「윤이상 ― 조국이 등진 음악가」

정명훈과 윤이상,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이 두 음악가는 모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작곡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또 이 두 사람은 정치 때문에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제한받는 경험을 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너무나도 상이하며 대조적이다. 이는 비단 일반인들의 광범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의 ‘지휘자’와 일반인들에게 낯설 수 밖에 없는 ‘현대음악 작곡가’라는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 차이는 두 사람에 대한 한국 정부 및 언론의 평가와 관련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정명훈이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과 음악적 삶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면, 윤이상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정치적 삶’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알다시피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납치 귀국’한 윤이상은 ‘조국’의 감옥에 갇힘으로써 악명높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당시 독일 정부와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연주회를 열고 기부금을 모으며 박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음은 잘 알려진 얘기다. 그 호소문에는 스트라빈스키, 리게티, 스톡하우젠, 카라얀 등의 이름이 있었으며,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항의 표시로 서울 연주회를 취소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수많은 저명 예술가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오직 한사람의 음악가만이 그를 변호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당시 서울예고 교장이던 지휘자 임원식은, 비록 실정법은 어겼을지라도 윤이상의 진심은 순수한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를 위한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임원식은 이렇게 말한다. “작품은 작가의 성향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공산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다. 그의 법위반은 순수한 창작적 동기와 오랜 해외생활로 인해 한국적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확신한다.”

금의환향을 꿈꾸던 작곡가를 혹독한 고문과 무기징역으로 맞이한 그의 ‘조국’은 그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부에서 유화적으로 나오면 전화가 쇄도하다가도 다시 정부가 냉담해지면 썰물처럼 적막해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는 기억을 가슴아프게 회고해야 했던 사람이라면, 심지어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에게조차 대접을 받기 힘든, 또 그것을 요구하기조차 힘든 사정에 처한 스승이라면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시사저널』의 김현숙 기자는 “윤이상의 발길이 북한으로 자주 가 닿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북한에서 윤이상은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정이 윤이상과 한국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동백림 사건에 휘말린 ‘간첩’ 윤이상은 차라리 냉전 체제 속에서 그 체제에 눈치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자신의 창작 욕구를 위해(그는 복사본으로만 본 적이 있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직접 보기 위해 북한행을 결심했다고 술회한다. 이 고분벽화는 그의 음악이 갖는 도교적 사상을 설명하는 예로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다) 현실의 정치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순진한 예술가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정치가’로서의 윤이상에 대한 한국내의 곱지 않은 시각은 ‘문민 정부’가 들어선 지금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윤이상의 입국을 허가한 정부에 대해 조선일보의 사설은 친북 인사인 그를 받아들인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고, 『월간조선』 8월호는 「조국을 등진 윤이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그는 한국을 ‘동백림 사건’을 통해서만, 북한은 ‘김일성이 보여주는 대로’만 보아왔다”고 하면서, “그가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고통받으면서 이로 인해 생긴 원한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해소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과 친밀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보상받으려 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야말로 윤이상을 ‘동백림 사건’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이데올로기적 안경’을 통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극단적인 형태로 ‘조국’의 칼날에 상처 받은 예술가의 심정을, 아니 이미 세계적 명성을 굳힌 지 오래인 그의 음악과 예술에 대해 그들은 손톱 만큼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던가? 결국 귀국을 앞둔 윤이상에게 정부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고,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던 윤이상은 결국 그렇게도 바라던 귀국을 포기했다. 정부가 요구한 그 각서야말로 엄청난 효과를 갖는 정치적 활동이 아니었을까?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그랬듯이 이번에도 윤이상의 귀국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귀국을 했건 못했건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귀국했다면, 그에 대한 관심은 어떤 방식으로든 좀 더 본격화되었을 것이고, 9월 8일부터 17일까지 예음문화재단에서 개최한 “윤이상 음악축제”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겠지만 말이다.

음악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음악이다. 작곡가가 무슨 발언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든간에, 그의 모습은 자신의 음악 속에서 가장 진실되게 나타나는 것이며,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작가의 내면적인 삶의 흔적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열린 “윤이상 음악축제”는 그동안 금기시되어온 윤이상의 작품을 통해, ‘정치가’로서의 윤이상이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윤이상을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특히 이번 축제를 통해 선보인 작품들은 윤이상의 전체 음악세계를 잘 엿볼 수 있는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관현악곡으로는 자연에 도전하는 자만스러운 인류에 대한 경고를 표현한 교향곡 3번(1985), 외부와의 부대낌 속에 갈등을 느끼고 고통과 절망의 과정을 겪는 자아와 자유에의 조망을 담고 있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81), 80년 광주 항쟁을 회화적으로 구성한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1981) 등이 연주되었고, 실내악곡으로는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1963), 현악사중주 제6번(1992) 등 초기곡부터 최근곡까지 다양한 실내악 편성의 곡들이 선을 보였다. 또 오페라로는 도교사상을 보여주는 두개의 단막 오페라 <류퉁의 꿈>(1965)과 <나비의 꿈>(1968, 이 작품은 혹한의 옥중에서 언손을 녹여가며 완성한 작품으로 유명하다)이 공연되었다.

아직 그의 음악은 일반에게 ‘낯설은 현대음악’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이상 음악에 대한 연구와 비평이 활발한 유럽음악계와는 달리 윤이상 음악의 연구가 거의 전무했던 한국 음악계의 사정에 비추어볼 때, 오히려 이제는 ‘정치가’ 윤이상이 아니라 작곡가 윤이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심지어 그에 대해 존경과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작곡가 윤이상은 여전히 ‘정치가’ 윤이상의 모습에 가리워져 제대로 이해되지도 연구되지도 못했다. 이제는 더이상 윤이상의 정치적 행보가 아니라 그의 음악에 주목해야 할 것이며, 정치의 잣대가 아니라 음악의 잣대로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신문 1994년 9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