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게티, 횡단의 음악
이희경 저 | 예솔(예솔기획) | 2004년 10월 24일
2005 대한민국학술원 지정 우수학술도서
목차
서문
제1부 음악과 삶 사이
1. 리게티를 이해하는 네 가지 시선
영원한 타자, 사이 존재-삶의 조건 / 끊임없이 횡단하고 접속하는 유목민-사유방식 / 암시, 모호, 역설, 유머-예술적 감각 / 얼어붙은 시간, 무질서의 질서-음악적 내용과 표현 / 후주: 세 개의 에피소드
2. 삶의 여정, 음악의 행로
루마니아의 헝가리인 / 어린 시절의 음악적 경험 / 상상의 나라 “킬비리아” / 첫 음악 수업 / 정치·사회적 격변기의 동유럽 / 과학자의 꿈을 접고 클루지 콘서바토리로 / 2차 세계 대전. 생과 사의 문턱에서 / 부다페스트 음악 아카데미 / 민요 현장연구와 대학 강의 / 공산정권 하의 실험적 작곡가 / 서방으로의 탈출 / 빈에서 쾰른으로 / 다름슈타트 하기현대음악제 / 작곡가로서의 성공 / 큐브릭의 영화 속으로 / 베를린과 첫 미국 방문 / 함부르크 음대 교수로 / 68혁명의 유산 / 오페라 이후의 공백 / 변화하는 새로운 지적 흐름과 조우 / 새로운 출발 / 노년의 작곡 인생
3. 리게티의 이웃들
바르토크와 코다이 / 베레쉬와 쿠르탁 / 크루디와 뵈외레쉬 / 드뷔시 / 스트라빈스키 / 쇤베르크와 베르크 / 베베른 / 말러와 아이브스 / 바레즈와 메시앙 / 슈톡하우젠과 불레즈 / 카겔 / 크세나키스와 펜데레츠키 / 케이지와 백남준 / 라일리와 라이히 / 패르취 / 차우닝과 리세 / 낸캐로우 / 주목한 작곡가들 / 친화적인 작가들과 화가들 / 과학자 친구들
제2부 무지카 리체르카타: 음악적 탐색
1. 현 위의 인생: 현악 실내악곡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발라드와 춤곡> / <첼로소나타> / <현악사중주곡 1번> “야상적 변용” / <현악사중주곡 2번> / <분지들> / <비올라소나타>
2. 호른과 그의 친구들: 관악 실내악곡
관악오중주를 위한 <여섯 개의 바가텔> / 관악오중주를 위한 <열 개의 곡> / 바이올린, 호른, 피아노를 위한 <트리오>
3. 음악적 실험의 무대: 건반악기 작품
오르간곡 <리체르카레> <볼루미나> <두 개의 연습곡> / 쳄발로곡 <콘티눔> <헝가리언 록> <헝가리 파사칼리아> / 피아노곡 <무지카 리체르카타>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곡> / <피아노연습곡>
4. 거장성의 현대적 발견: 협주곡
<첼로협주곡> / <실내협주곡> / <이중협주곡> / <피아노협주곡> / <바이올린협주곡> / <함부르크 협주곡>
5. 음향작곡의 매체: 관현악곡
<루마니아 협주곡> / <환영> / <아트모스페르> / <론타노> / <선율들> / <샌프란시스코 폴리포니>
6. 아카펠라에서 인성음악까지: 성악 작품
헝가리 시절 합창곡들 / 성악 앙상블곡 <아방뛰르>와 <누벨 아방뛰르> / <레퀴엠>과 <영원한 빛> / 여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시계와 구름> / 아카펠라 합창곡 <세 개의 환타지>와 <헝가리 에튜드> / <넌센스 마드리갈> / <피리, 북, 깽깽이로>
7. “거대한 죽음”: 음악극 작품
<아방뛰르>에서 안티-안티-오페라로 / <레퀴엠>과 <그랑 마카브르> / 장면과 줄거리 / 음악적-극적 구조 / 표현상의 특징 / <마카브르의 신비>와 <마카브르 꼴라주> / 개정판
제3부 리게티 음악의 문턱들
1. 음렬음악을 넘어서
시작하는 말 / 테마적인 것에서 음렬적인 것으로 / 음렬적인 것을 넘어서: 리게티의 문제제기 / 60년대 음악 형식 논쟁 / 정지된 음악. 리게티 초기작품의 구도 / 정지된 음악을 넘어서기 위하여
2. 카오스모스의 음악
시작하는 말 / 모색과 위기의 70년대 / 다양한 접속과 횡단의 매듭들: 낸캐로우, 아프리카 음악, 프랙탈과 카오스 / 폴리리듬과 다차원적 폴리포니 / 프랙탈적 구성방식
3. 음악의 지도. 분기의 양상
시작하는 말 / 바르토크-‘되기’ / 서유럽 아방가르드와 접속하여 / 이른바 ‘리게티 양식’의 생성과 분기 / 아방가르드와의 절연.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접속 / 또 다른 ‘리게티 양식’의 생성 / 끝없는 접속과 분기
4. 리게티의 작곡 스타일
작곡. 직관과 구성 사이 / ‘음악적 망형성체’와 폴리포니 작법 / 형식 형상화 방식 / 악기법(관현악법)의 특징 / 전통에 대한 중의적 관계 / 맺는 말
리게티 연보
작품목록
음반목록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리게티 작품 찾아보기
서문
나와 리게티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벌써 9년이 되었다.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의 열광적인 지지자도 아니지만, 그는 나의 30대에 나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만 서른의 나이로 베를린 유학길에 오르며 나는 서양음악을, 특히 서양의 현대음악을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리라 마음먹었었다. 무슨 거창한 포부로 그랬던 것이 아니다. 당시 한국의 현대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것이 필요하리라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간주되던 1960년대를 집중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구체적인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리게티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한 선택이었다. 당시 나는 그에 관해 많이 알지 못했지만, 한두 곡 들어본 그의 음악이 다른 현대 작곡가들보다 좀 더 귀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택했다. 박사 논문 주제와 방향을 정하기 위해 그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우연한 선택에 너무나 감사했다. 그의 음악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세계였고, 그의 작품은 수없이 들어도 좋을 만큼 깊이 있는 정신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다른 현대 작곡가를 선택했더라도 박사 논문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를 통해, 끝없이 가지 쳐나가는 그의 폭넓은 지적 세계와 다양한 예술 세계를 유쾌하게 탐사해나갈 수 있어 행복했다. 다행히 그의 세계는 나의 부족한 교양 수준에도 불구하고 내가 걸어왔던 지적, 예술적 지반과 그리 멀리 있지 않았으며, 예술적 감각 면에서도 말하자면 ‘내 취향’이었다. 그의 폭넓은 관심사와 여러 영역을 넘나드는 지적인 호기심 덕분에 나는 서양의 문화를 또 다른 시각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었고, 20세기 음악만이 아닌 서양음악사 전체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과학의 새로운 영역과 다양한 문학 작품들 및 전 세계의 다양한 음악들, 그리고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역사와 문화 등에 눈과 귀를 열게 되었고, 그렇게 열린 시야는 이제 나 스스로 나만의 새로운 영역을 찾아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 작품과 작곡가를 이해하는 구체적인 방법, 20세기 음악의 수많은 아웃사이더들, 주류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함을 찾아 나간 수많은 예술가의 흔적들과 여러 영역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생성시켜가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에게서’, 그‘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책은 내가 배웠고 느꼈던 것들의 결실이다. 마침내 하나의 소중한 인연을 뒤로 하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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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은 이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하나의 편견이지만, 리게티 음악에게는 더더욱 맞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들리는 소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거창한 작곡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나 거대한 이념을 담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상상하는 새로운 소리의 창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추구하는 소리는 고도의 정신성의 산물이며, 그런 점에서 여전히 광범위한 청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아주 실험적인 시기에 나온 것들조차도 그 시기의 정신적, 감성적 소리 감각을 지닌 것이기에, 미래의 음악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진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리게티의 음악은, 1960년대 실험적인 젊은 감독 큐브릭이 상상했던 바로 그 우주의 소리였던 것이다.
리게티는 스스로 장인성과 상식의 신봉자라 말한다. 새로운 과학이나 학문에 대한 관심과 그것을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과 결부 짓는 그의 통찰력은 결코 현학적이지 않고 상식을 지닌 교양적 인간이 이해 가능한 선에서 이루어진다. 수없이 많은 영역을 넘나들며 창작의 계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창작적 문제의식과의 유사성을 찾아내지만, 결코 음악의 문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환원하지 않는다. 작곡할 때 청중을 염두에 두며 곡을 쓰지는 않지만, 상아탑 속에 갇힌 아카데미즘 역시 혐오한다. 작곡이란 자신이 직면한 창작의 문제를 차근히 풀어가는 것이므로 철저하게 개인적인 작업이지만, 상식의 범주 안에 있는 작곡가로서 끊임없이 세상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가기에 청중과 소통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작업 방식으로 인해, 그의 음악 세계는 아카데미즘에 빠지거나 비현실적이지 않고, 이론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으며, 현대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꽤 많은 수의 청중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나는, 작곡가에 대한 책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가 살아온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그 작품들을 나열하며 설명하는 데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예술가, 하나의 작품 속에는 그 시대의, 그 작가의 정신성이 담겨 있으며, 수많은 종횡의 양식사적, 사회문화사적 측면들이 교차되고 있기 때문이다. 리게티처럼 세상에 무한한 호기심을 갖는 예술가,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접속하며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펼쳐가는 작곡가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리게티라는 한 사람의 작곡가를 통해 20세기 서양의 중요한 문화사적 흐름과 예술적 경향들, 그리고 20세기 후반 현대음악의 여러 화두를 함께 다루고 싶었다. 제1부 ‘음악과 삶 사이’는 이러한 배경에서 쓰였다. 여기서는 리게티 음악을 특징짓는 주요한 네 가지 측면들과 함께, 이 작곡가의 삶의 여정과 음악의 행로 및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혹은 그의 예술적, 정신적 환경이 되었던 수많은 이웃들이 다루어졌다. 여기서 독자들은 한 사람의 현대 작곡가를 통해 드러나는 20세기 서구 문화의 한 단면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의 전체 창작 세계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각 작품은 이전 작품을 전제로 탄생한 것이고, 다음 작품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며, 이후 작품을 낳게 하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 작가의 작품 세계란 서로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작품들의 관계를 통해, 그 이질적이고 다층적인 모습들의 연관의 망을 통해 그려질 수 있다. 제2부 ‘무지카 리체르카타: 음악적 탐색’은 이러한 리게티의 작품 세계를 다룬 부분이다. 여기서는 각 작품의 개별성과 함께 각 작품이 이전의 혹은 유사한 장르의 다른 작품들과 맺는 다양한 연관의 망을 보여주려 했다. 리게티의 전체 작품들을 장르별로 7장으로 나누어 시기별 문제의식에 따라 어떻게 음악적 양식이 변모해 가는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영역은 관련 작품들이 언급될 때 포함시켰는데, 예컨대 전자음악 <분절>은 성악 앙상블곡 <아방뛰르>와 연관하여 다루었고, 1960년대 플럭서스의 일환으로 나온 작업들에 대해서는 제3부 3장에서 다루었다.
제3부 ‘리게티 음악의 문턱들’은 지난 3년간 발표한 논문들을 약간 수정하고 정리해서 실은 것이다. 일반 독자들이라면 아마 가장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는 전문적인 성격의 내용이다. 1장과 2장이 음렬음악과 대결하면서 형성된 이른바 리게티의 초기 양식과 1980년대 새로운 양식의 확립을 다룬 것이라면, 3장은 수없이 많은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 형성되는 리게티 작품 전반에 걸친 창작적 문제의식의 지도를 그려본 것이고, 4장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가로지르는 고유한 작곡 스타일을 정리해본 것이다.
이 책에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등 다양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작품명이 등장한다. 인명과 지명은 원어의 발음을 토대로 국내에서 통용되는 용례를 참조하여 한글 표기했으나, 헝가리나 루마니아 지명이나 인명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백과사전과 관련 문헌들을 참조했지만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인명도 적지 않아, 헝가리어나 루마니아어 사전과 문법책 등을 토대로 한글 표기를 선택했다. 작품명은 가능한 한국어로 번역하였으나, 번역이 어려운 단어나 작곡가 자신이 단어의 소리 울림 때문에 선택한 제목에 한해서 그 발음을 살리기 위해 원어를 그대로 한글 표기하는 방식을 취했다. 예컨대 <아트모스페르>나 <아방뛰르>, <그랑 마카브르> 같은 제목이 그러한 경우다. 이 책을 읽고 리게티 음악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의 마지막에 음반목록을 첨부했다. 리게티 관련 음반은 국내에도 많이 들어와 있는 편이라, 구할 수 있는 음반들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것만 소개했다. 마지막 인명 찾아보기는 연주자들을 제외하고 작가들로만 국한시켰으며, 본문이 아니라 찾아보기에 인명의 원어를 함께 표기했다. 찾아보기에 등장하지 않는 인명의 경우, 예컨대 연주자들은 본문 처음 등장할 때 원어를 병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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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작곡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필요하다며 용기를 준 많은 음악가 동료들, 비전공자들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라고 요청하던 인문학자 벗들과 음악애호가들, 그리고 엄마의 첫 번째 책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아들과 가족들, 모두가 이 책을 낳게 한 원동력이었다.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 내내 편집에 고생한 예솔 출판사 편집자들(특히 김미경 님)과 책의 출판을 허락해주신 김재선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리게티라는 한 작곡가를 통해 새로운 사유와 소리의 세계를 탐사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조그만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2004.9.20.
이 희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