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대담은 2005년 1월 7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열렸던 한국민족음악인협회 주최 민족음악포럼 4 작가와의 대화 “강준일의 음악과 삶”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희경(이하 이): 안녕하세요. 오늘 사회 겸 대담을 맡은 이희경이라고 합니다. 앉아서 해도 뒤에 소리 들리세요? 제가 몇 가지 질문을 준비해 오기는 했지만 편하게 얘기하면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청중들이 자유롭게 질문도 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네요. 일단 제 질문으로 진행을 하고, 여러분들께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잘 메모해 두셨다가 마지막에 따로 질문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강준일 선생님과의 오늘 이 대담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우리나라 작곡계에서 굉장히 독특한 삶의 이력과 음악의 여정을 보여주시는 작곡가이기 때문인데요. 작곡가라는 직업은 대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작곡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잖아요. 작곡가와 작곡 스승의 역할이 분리되는 건데, 강준일 선생님께서는 스승으로서의 역할도 많이 하셨지만 평생을 ‘전업 작곡가’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100곡이 넘는 많은 작품을 쓰셨고, 음악의 어떤 가치라고 하는 것을 꾸준히 계속 지켜오려 하셨으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창작계의 중요한 화두인 전통 문제를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일관되게 고민해 오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오늘 선생님의 삶과 작품들을 들으면서 그 수십 년에 걸친 문제의식의 축적 결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첫 질문으로 생각해본 것은요. 이 행사가 한국민족음악인협의회(이하 민음협)에서 마련한 것이고, 또 선생님께서 90년도 후반에 민음협 의장을 역임하셨어요. 그래서 굉장히 근본적이고 너무나 막연하고 광범위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선생님께서는 이 ‘민족음악’이라고 하는 걸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얘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민족음악은 내게 무엇인가
강: 현재 ‘민족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상식적으로 얘기해서 어떤 특별한 종족의 음악이나 예술 문화라고들 하죠. 보통 그렇게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게 자기 것일 때는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민족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냐 하는 질문을 받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요. 예를 들어 내가 충청도 사람이면 충청도 말의 억양과 충청도 식의 문화 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나 아니겠어요? 남들이 그게 사투리다 뭐다 얘기하는 것과 전혀 관계없이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란 말이죠. 한 나라의 음악이나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돼요. 그런데 민족음악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을 만나면 저는 절벽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마치 남 얘기 하듯이 자기 얘기는 빼고 ‘너 민족음악 하냐?’ 이렇게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본단 말이죠.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있어 민족음악이라는 것은 그냥 내가 해야 할 음악,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의 의미와 본질이 무엇일까를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나온 답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여러 가지겠죠. 저희는 여러분들과 조금 다른 시대에 살았는데, 농경사회의 맨 마지막 끝 장면을 경험했어요. 적어도 내가 한 10대 중반, 아니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도 우리 아버지 고향에 가면 아직도 농경사회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그 풍습과 문화에 상당히 적응하려고 애를 쓰고 살다가, 갑자기 변하는 시대를 후반에 살게 되었죠. 예를 들어 내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이혼을 한다 하면 패가망신이고 마치 무슨 정신병자나 인격 파탄자 그런 거로 여겼는데, 오늘날 그렇게 얘기하면 이 사회는 인격 파탄자가 더 많다고 볼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세상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전혀 꿈도 꾸지 못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민족음악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히 나와 관계된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라면서 그 사이에 많은 갭이 있었던 거죠. 학교생활에서 서양음악과 더 가까이 하게 되었고, 일반적으로 음악을 한다거나 음악을 좋아한다거나 하면 당연히 그냥 서양음악을 얘기하는 것이 상식이었어요. 그러다보니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음악은 이런 것과 조금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민족음악’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내가 하려고 하는 얘기와 뭔가 소통이 된다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 우선 질문을 조금 더 부분 부분 해야 되겠지만 ― 제게 있어서 민족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자라난 뿌리와 어렸을 때의 경험과 문화를 지닌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서양음악이란
이: 얘기를 조금 더 진행해나가다 보면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 방금 말씀하셨듯이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음악을 한다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70년부터 서울음악학회(Seoul Musician’s Academy, 약칭 SMA) 캠프를 계속 해오고 계셔요. 지금은 물론 그 캠프에서 국악도 하고 그러지만 원래는 서양음악을 한 사람들의 모임인데요. 서양음악이라고 하는 건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여쭤봐야 될 것 같네요.
강: 네. 이게 참 묘하죠. 저희 아버님은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시는 분이었어요. 은행원으로 교회 장로님이기도 하셨는데, 요새는 예수를 믿는 게 그렇게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저의 아버님 세대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굉장히 진보적인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젊으셨을 때는 요즘 우리가 운동권 하듯이 민족해방운동 비슷한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신 적도 있어요. 나중에 아버님한테 얘기를 들었지만, 한창 젊었을 때는 기독사회주의 라는 게 유행이 되어서 그야말로 기독교를 믿는 젊은 청년들은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고, 그러면서 기독교적인 세계로 가까이 가신 것이죠.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저도 선택의 여지없이 기독교를 믿게 됐는데, 상당히 오랜 동안 기도를 안 하고 자면 ‘이거 혹시 벼락 맞지 않을까?’ 생각했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20대 초반까지도 ‘아마 하나님께서 벌주실 지도 몰라’ 이런 막연한 공포심이 있었어요. 그런 환경에서 음악도 특별한 여지가 없이 그냥 서양음악이 음악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아까 얘기했듯이 내가 자라난 지역적인 환경이나 경험은 전혀 서구적인 음악이 아닌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과 저것의 두 가지가 따로따로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건용 선생을 비롯하여 제 비슷한 연배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체험이 몇 가지 있는데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보이스 오브 유나이티드 네이션(VNC)’이라고 하는 UN군 사령부에서 하는 방송이 있었어요. 그 방송 중에 한 채널이 클래식 음악을 하는 것이었는데, 물론 하루 종일 클래식만 나오는 건 아니고 중간 중간에 재즈도 나왔지만. 여러분이 알다시피 UN군 방송이라는 게 대체적으로 첩보활동도 했을 것이고, 2차 대전 때도 그랬듯이 중간 중간 부호에 의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채널이 있기도 했겠지만, 자기들 딴에는 문화를 전파한다는 목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침 새벽에 2시간, 낮에 2시간, 저녁에 2시간, 한 밤중에 2시간,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녹음해서 똑같은 패턴으로 2시간을 반복해서 방송을 했는데, 그 주기가 한 50일 정도 갔던 것 같아요. 요즘처럼 매니아 클럽 같은 것도 있어서 친구들끼리 ‘야 이게 몇 가지 레퍼토리로 지나가나 내기해보자. 오늘 나오는 음악, 내일 나오는 음악을 알아맞히면 점심사기다’ 이러면서 지냈는데, 예를 들어 오늘 브람스 피아노 콘체르토가 나왔으면 내일은 틀림없이 베토벤 5번 교향곡이 나온다 그런 식으로 레퍼토리를 다 외우고 있는 거죠. 이렇게 50일 동안 연주되는 음악들을 몇 년씩 똑같이 반복해서 들었다는 건 상당히 특이한 체험이에요. 그러니까 제 연배들은 아주 독특한 공통의 체험을 한 거죠. 음악 레퍼토리가 하루 저녁 두 시간에 7~8가지가 나온다면 네 번만 지나가도 30곡정도 듣는 게 아니겠어요? 이게 한두 달쯤 지나가면 또 돌아온단 말이에요 또 돌아오고 투덜대면 또 돌아오고. 그러니까 거기서 나오는 음악을 다 외우게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르네상스’라고 하는 유명한 음악 감상실이 있었어요. 종로 네거리 신신백화점 바로 뒷 빌딩의 4층인데, 지금 이 방의 2~3배 정도쯤 되는 방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 아침 10시에 들어가서 음악을 신청하고 듣다가 저녁 10시쯤 나오는 거예요. 더는 배가 고파서 못 있는 거죠. 그 당시 제 연배에는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거기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돈도 없었고 갈 데도 없었던 데다가, 또 여러분들하고 절 보면 알지만 우리 세대들의 가장 그 큰 문제가 사람들이 좀 시리어스(serious) 하잖아요. (웃음) 그렇게 시리어스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리어스하게 자태를 취하고 정말 인생의 모든 고난을 겪은 사람들처럼 턱 앉아서 10시간씩 있는 그런 고행을 했는데, 아마 그런 공통적인 경험이 서양음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만큼 절대적인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60년대에서 70년대를 넘어올 당시에는 문화에 대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던 것이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음악이란 것은 그냥 들리는 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음반이란 것도… 우리나라에서 클래식 애호가를 위한 음반이 50장 나왔는데 물론 카피죠. 그것도 굉장히 조야하게 만든 해적판인데, 어쨌든 그런 레퍼토리가 하나 나오면 우리 비슷한 연배들끼리는 그 음악을 다 외웠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르네상스’ 감상실에 있는 음반이 몇 종류나 되는지,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연주자는 누구인지 다 아는 거죠. 그러니 나중에는 ‘아 이제 좀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없을까?’, ‘여기 있는 것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좋은 음악을 들어볼 수는 없을까’라는 얘기까지 나오는 거예요. 하여튼 그런 이상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서양음악을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무슨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주어진 사명이라고 얘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내게 전통음악이란
이: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70년대부터 전통음악가들, 실제 전통음악을 하시는 분들하고 교류도 많으셨고 또 고민도 굉장히 많이 하셨는데, 그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강: 거기에는 약간의 숙명론이 있어요. (웃음) 저는 숙명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냐 하면 제가 태어난 시간이 아주 절묘한데요. 다른 사람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예를 들어 사물놀이를 하시는 김덕수 선생이 1953년 생인데 김용배니 이광수니 하는 사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나 서너 살 때부터 서로 얼굴을 익혀서 사물놀이를 하게 되었고, 자기 아버지 때에도 같이 사물을 했어요. 그게 뭘 의미하냐면 그들이 도제식 교육, 정말로 몸으로 전통음악을 배운 마지막 세대라는 거예요. 그 뒤 세대로 가면 선생님한테 도제식으로는 배웠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한 건 아니지요. 그렇게 한 10년쯤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60년대 말, 69/70년에 유신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되면서, 새마을 운동이 아주 기승을 부렸죠. 박정희 정권이 자기들로서도 어쩔 방법이 없었겠지만, 하여튼 우리나라 민속예술을 완전히 탄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탄압을 하고 싶어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새마을 운동을 하려고 하니까 우선 이걸 없애야 되는 것도 있고, 또 박정희가 생각할 때는 자유당 정권의 어떤 힘을 완전히 말살시켜야 되는데, 이승만 정권의 이른바 선거 토대였던 것이 원래 농악패랑 점술 하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원래 민족적인 바탕을 갖고 있었는데 이승만 씨는 알다시피 해외에서 들어왔잖아요. 그러니 중상류층의 바탕이 없었단 말이에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그 조직적인 바탕이라는 것이 주로 복술을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점치는 사람들이나 농악패와 사당패 등이 말하자면 이승만 정권의 유일한 표밭이 된 거죠.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을 장악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정재와 임화수 같은 사람이에요. 최근에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셨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당연히 자유당 정권이라는 게 전통음악을 상당히 중요한 것처럼 여겼고, 이승만 씨가 대통령이 되면서 농악 경연대회 이런 것도 열고, 그런 사람들을 장려하기도 했어요. 그러니 박정희가 집권을 하면서 당연히 그런 구시대의 조직력을 없애려다 보니까 절대로 점을 치거나 무속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거기다가 새마을 운동에도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주니까 사물(四物)을 치면 무조건 안 된다고 해서 사물을 다 걷어갔죠. 마을마다 사물을 다 걷어가지고 특별한 곳에 버리던가, 아니면 뭐 마을 이장 집에 쌓아놓고 그걸 묻히게 했습니다. 그래서 66~67년쯤 됐을 때는 복술 행위나 농악 등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70년대 초반이 되면 지금 기록에 남아 있는 인간 문화재급 되시는 우리 윗 선생님들 세대, 지영희 선생님이나 신쾌동 선생님 이런 분들이 거의 밥을 먹고 살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어요. 김소희 선생님이나 박귀희 선생님 세대들이 결국은 환갑이나 결혼식장에서 노래 부르셔야 되고, 때로는 고급 요정에서도 노래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게 된 거죠. 그러던 즈음에 몇몇 뜻있는 분들이,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하면 최순우 선생님이라는 우리 전통문화의 대부가 계셨어요. 초대 박물관장을 하셨는데 이분이 박물관, 미술관 관련된 분들을 다 규합해서 ‘이러다가 우리 전통음악이나 무속이 이제 씨를 말리겠다’하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락동인회’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이 분들을 모셔다가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돈을 모아드려야 되는데 돈을 그냥 모아드리면 뭐라 그러시니까, 모셔다가 조그만 방에서 연주를 하시라고 하고 그때 돈으로 30~40만 원정도 드렸어요. 지금으로 치면 한 300~400만 원쯤 드린 거예요. 근데 그런 일을 나이 드신 분들이 할 수 없으니까 이름을 적어주시면 젊은 우리가 찾아다니면서 선생님들을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고 같이 녹음도 하고 그런 걸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다 제가 거기에 끼게 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숙명이라는 거예요. 24~25살 때의 이야기인데, 어쨌든 그래서 정말로 본의 아니게 3년 동안 웬만한 분들은 다 만나보게 되었죠. 그 양반들과 인터뷰도 하고, 모시고 와서 연주하는 것도 보고, 어떤 때는 눈물 흘리시며 신세타령 하는 그런 말씀도 다 듣고요. 그러고 나서 77~78년 되는 때에, 잘 아시겠지만 제 아우 되는 강준혁이 유명한 건축가인 김수근씨가 만든 ‘공간사랑’이라고 하는 조그만 소극장의 소위 극장장이 되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소극장이었는데, 이 공간사랑이 78~79년 사이에 우리 전통문화를 어떻게든지 중흥 시켜야겠다고 해서, 당시 남아있던 굿, 농악 이런 걸 다 무대 위에 올렸습니다. 처음으로 굿이 무대 위로 올라간 거죠.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어요. 뭐 알다시피 사물놀이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 지금 많이 알려진 공옥진이나 이매방 이런 분들이 다 강준혁의 손에 의해서, 소위 퍼포밍 아트로 시작이 되었죠. 제가 살아온 몇 개의 단계 중에 지금 이 두 경우만 해도 숙명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스스로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내 근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나도 거기에 참여해서 그 일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나의 이력과 관계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안숙선 선생이나 김덕수 선생이나 이런 분들이 다 백면서생에 30대도 안된 나이 때, 정말 어디 갈 때도 없으니 서로 모여가지고 우리나라의 이 좋은 전통음악을 정말 우리가 이렇게 버릴 수 있냐 이런 신세타령을 하면서 막걸리를 먹고. 이런 시대를 우리는 경험한 거죠. 그런데 80년대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바로 이 문제를 아주 정면에서 내걸게 됩니다. 그게 ‘국풍’이라는 사건인데, 보통 사람들은 ‘국풍’이 왜 일어났는지를 모르겠지만, 상징적으로 민속음악, 그 때까지 억압 받던 민속음악을 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오면서 당시 그러한 정책을 주도했던 허문도라는 분이 상징적으로 사물놀이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하여 자기 스스로 그걸 정책적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김덕수 패가 갑자기 여러분들이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스타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죠. 물론 이런 것이 단순히 어떤 한 개인의 힘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에요. 누가 단순히 의도를 했다고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났고 그런 시대를 만났고 그렇게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의해서, 우리도 모르게 정말 민속음악이라는 게, 우리 민족음악이라는 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라는 그런 상황과 점점 맞아 떨어지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가락동인회’일에서부터 사물놀이가 전면에 나올 때까지 딱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내가 왜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가하는 숙명론을 생각하게 되죠. 지나놓고 보니까 내가 이 역사의 틈바귀에서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게 태어난 것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 겁니다.
내게 음악이란
이: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까 궁금한 것이 생겼는데요. 50-60년대에 관한 얘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이 ‘VNC’라는 미군 방송을 통해 서양음악을 듣게 되는 공통의 경험을 했다는 것과 당시 음반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르네상스’라는 음악 감상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들었다는 것인데요. 거기서는 개인적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다함께 모여서 들었고, 게다가 아까 말씀하셨듯이 모두들 굉장히 진지했었다니, 그런 식으로 서양음악을 접하는 것은 지금 저희들이 서양음악을 접한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제 경우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고, 예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음악대학을 나왔지만, 계속해서 갖고 있던 생각이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내 삶과 굉장히 유리되었다 라는 거였거든요. 한국의 음악계가 말하자면 음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여러 상황이 많았던 것 같고, 제 경우는 사실 그 문제를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해결한 것이 몇 년 안 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이전 세대인데도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과 음악을 같이 고민하셨던 것 같아요. 그 한 결과가 저는 서울음악학회(SMA)라고 생각되는데, 그 시절에 부잣집 애들이나 음악을 하는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함께 모여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30년 이상 꾸준히 음악의 정신 그런 걸 이어오신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뭐 그런 식의 얘기를 좀 더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 저는 63년도에 대학을 들어갔고,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음악과 관계없는 물리학을 하다가 66년도에 음대에 작곡공부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게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셔서 불과 1년도 공부를 못하고 포기하게 됐습니다. 그 다음 한 2년 동안은 제 인생에 있어 굉장히 멋있고 낭만적인 삶을 살았죠.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정말로 원없이 한번 살아봤습니다. 공장에서 일도 해보고, 길거리에 나가서 외판원도 해보고,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배달도 해보고. 상상이 안 가죠? 2년 동안 그 살림이 저에게 있어서 아주 커다란 화두를 하나 던져주었어요. 그것이 뭐냐면 내가 너무 쓰잘 데 없이 진지하고 낭만적이어서 예술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착각을 버려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었어요. 일단 내가 이때까지 살아온, 요즘 식으로 말하면 좀 딜레탕트한, 그 나약한 지성 같은 것을 버리고 현실의 삶을 내가 받아들여 살아야 되겠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가면 아마 음악과 딱 갈라설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7~8개월이 지나서부터 점점 어떤 화두가 드는가 하면, ‘모든 걸 다 버려도 음악과는 바꿀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뭘까, 이제까지 평생 살면서 몇 개의 풀어지지 않는 숙제가 있었는데, 내 가슴 속에 항상 뭔가가 있어서 그걸 꺼내야 되는데 왜 이게 안 꺼내질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 생각이 언제부터 있었는가를 다시 되새겨 봤더니 아마 한 열 살, 아홉 살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내 속에 뭔가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든 꺼내야 되는데’라는 생각과 ‘아, 내가 이런 쓰잘 데 없는 망상에 시달리는구나’ 하는 또 다른 생각이 갈등을 하는 거죠. 뭐 우리가 다 그런 계획을 갖지 않습니까? 대개 남자는 큰 뜻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건데, 쓰잘 데 없는 건 버리고 그냥 현실적인 삶을 살자 라는. 우리 세대는 아시다시피 월남전에도 갔고, 사우디에도 갔고, 우리 나이만 해도 접시 닦으면서 배를 타고 석 달씩 가야 미국으로 유학갈 수 있는 그런 시대였거든요. 상상이 안 가죠? 지금은 열 몇 시간 미국 가는 것도 ‘어휴, 어떻게 가?’ 이런 판인데 우리 연배들은 다 그렇게 갔다고요. 그러니까 그까짓 음악 뭐 이런 걸 때려 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을 했어요. ‘난 하루아침에 때려 치겠다.’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게 정말 뭔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67-68년에 그 유명한 동백림 사건이 있었고, 그걸 필두로 바로 저보다 10년 위인 강석희, 백병동 선생님 같은 세대들이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동백림 사건의 윤이상 선생님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유학을 가게 됐어요. 어떻게 유학을 가게 됐냐면, 윤 선생님이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 동안 윤이상 선생님 비슷한 연배의 선배들이 ‘야, 이러다가 대가 끊어질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에 윤이상 선생님하고 접촉을 해서 ‘후배들 유학이라도 좀 보내줘라, 너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해서 윤이상 선생님이 추천서도 써주고 해서 유학을 갔어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바로 제 위 세대들은 사실 아주 새로운 시대에 서양음악을 하러 떠난 세대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했냐하면, ‘저 분들이 저기 갔는데 우리까지 가야 될 이유가 있나?’라고 생각하는 세대가 된 거죠. 저는 이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안 떠나기로 결심을 해서 90년대까지도 외국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는 박물관에 특별히 전시를 해야 될 사람 같다’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어쨌든 우리가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인 68, 69년이, 여러분도 알다시피 참 묘한 해에요. 학생운동이 굉장히 심했고 탄압도 심했죠. 68년 서울 음대에서도 ‘우리도 뭔가를 해야 되겠다’ 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는 금난새라는 분이 학생회장을 했고 문호근 선생이 부회장을 하던 때였으니, 뭐 학교가 성했을 리가 없죠. 그때 ‘캠프를 하게 해 달라’는 명목으로 휴교를 했는데, 우리가 서울 음대 사상 처음으로 동맹휴교를 해서 성공을 한 세대가 되었어요. 그래서 결국 음악캠프라는 걸 처음 하게 되었는데, 그 캠프의 전체 계획을 어떻게 하다 제가 하게 된 거예요. 그 당시에는 아무도 학생을 받아줄 곳이 없으니까 원주 가톨릭 교구에 계시던 지학순 주교가 아주 선뜻 ‘너희들을 우리가 받아주겠다’ 해서 가톨릭 기숙사와 회관을 빌려서 처음 캠프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제가 그걸 하면서 굉장히 새로운 걸 많이 깨닫게 됐어요. 그게 뭐냐면, ‘아, 음악은 그냥 하면 되는구나’ 이런 걸 깨달은 거지요. 좀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음악이라는 건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그 캠프를 하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거든요. 바로 음악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으니까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런데 69년 유신이 되면서 여름에 계엄이 되었어요. 학생운동은 관두고 숨도 크게 못 쉬던 그런 해였기 때문에, 70년도에 다시 저희가 결성을 해서 캠프를 하겠다고 했더니 물론 학교에서 또 안된다고 했죠. 그래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다시 캠프를 결성하게 됐는데, 그게 지금 ‘서울음악학회(SMA)’라고 하는 것의 시작이 됩니다. 처음에는 금난새, 임헌정, 김광순 선생 이런 분들이 주도가 되어서 이 캠프를 시작했어요. ‘진짜 뭔가를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한 건물의 3층을 빌려서 8명이 같이 먹고 살았어요. 지금 이 공간보다 조금 큰 집이었는데, 정말 우리가 이름을 고아원이라고 그랬으니까, 그냥 먹고 산 겁니다. 돈도 없고 그러니까 겨우 먹고 살면서, 매일 모여서 ‘우리는 예술을 하자’, ‘그래도 우리는 예술을 해야 되지 않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술을 할까’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의 본질은 ‘결국 우리 스스로 이걸 해결해야 되지 않냐.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이 뭐가 없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다가 우리끼리 연주운동도 하고 곡도 써서 발표하고 그러면서 저희가 완전히 서울 음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죠. 저 뒤에 계신 김철호 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서울음악학회’하고 ‘음대 연극반’에 가면 졸업이 되냐 안 되냐 할 정도로 학교에서 아주 딱 찍힌 학생들이었어요. 1년이면 꼭 두 세 차례는 우리 때문에 교수회의가 열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지나 놓고 생각해 보니까, 바로 그런 억압이 저희들에게 참 많은 깨달음을 준 게 사실입니다. 하다못해 ‘SMA는 대남 공작원이 주기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웃음) 이러질 않나. 제 친구 하나가 군대를 갔는데, 그때는 차출되어서 정보부에 가서 근무를 했거든요. 이놈이 찾아와서 ‘야 네 사진이 동대문서에 시리즈로 걸려 있더라.’ (웃음), ‘왜 내 사진이 시리즈로 걸려 있냐?’ 그러니까 ‘네가 대북공작원의 똘마니인 줄 알고 있잖아!’ (웃음)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시다시피 그 당시 문리대가 소위 학생운동의 메카였고, 음대에서 볼 때 문리대 출신이 저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거 틀림없이 강준일이 하는 거다’ 이렇게 된 거죠. 우리가 살던 곳에도 음대 학생과 주임이 한 달이나 두 달이면 한 번씩 꼭 찾아왔어요. 나이가 좀 드신 분인데도 스물다섯인 저를 보시고 ‘아 강형, 내가 저녁 사줄게’ 뭐 이러시고. 처음에 난 순진했으니까 ‘이 양반이 왜 날 찾아왔나’ 했는데, 나중에 가만 보니까 정보를 얻으러 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그러지 말고 중요한 일 있으면 나한테도 좀 얘기해 달라’고 그래요. 그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전 알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사실은 그런 경험이 오히려, 스스로 이런 일을 해결해야 되겠다는 깨달음을 준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음악을 하고 살아야 되겠다’라는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음악을 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일부러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외국을 간다던가 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든지 음악을 하고 살아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것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것이 ‘서울음악학회’에서 같이 일했던 많은 우리 동료들이예요. 저는 정말 그 친구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참 이것도 어떤 숙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이: 제가 하나 코멘트를 달자면, 저는 평범히 공부해서 유학까지 다녀온 그런 경우인데, 사실 저는 음악의 많은 문제를 유학 가서 해결하고 왔거든요. 그런데 돌아와서 선생님을 뵈니까 선생님은 외국을 안 가셨어도 제가 깨달은 것보다 훨씬 멀리 서양음악의 본질을 꿰뚫고 계시더라고요. 이런 선생님을 보면서 저는 굉장히 어렵지만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몇 십 년 동안 치열하게 음악을 해오시면서 찾아오신 것, 이것은 우리가 굳이 서양을 가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선생님 말씀대로 이 안에서도 해결 가능한 것이고 또 그럴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대개는 다 나가서 해답을 밖에서 구하고, 그 밖이 기준이 되어서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것이 계속 괴리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의 서양 음악에 대한 통찰력과 식견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면서 굉장한 설득력과 타당성을 지닌 것이더라고요.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께 서양음악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도 아주 유익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이 즈음에서 선생님의 음악을 한 곡 들으면서, 작품 얘기로 넘어갔으면 합니다. 1983년도 작인 <마당>의 1악장을 조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물놀이와 관현악을 위한 <마당>(1983) 1악장 앞부분 감상
<마당>을 쓸 당시 고민했던 것
이: <마당>은 어떻게 보면 선생님을 유명하게 만든 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사실 ‘사물놀이’란 게 77-78년도에 결성된 국악의 새로운 장르고, 이 작품이 83년도에 씌어졌으니까 불과 5년 만에 ‘사물놀이 협주곡’이란 게 만들어지게 된 거잖아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선생님께서는 전통의 문제를 숙명적으로 고민하시게 되었고,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이러한 작품을 쓰셨는데, 이 곡을 쓰실 때 어떤 문제를 고민하셨는지요? 무엇보다 국악기하고 서양 관현악하고 만나는 것은 우선 소리의 질감이 너무나 다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양자가 같이 나오는 곡을 썼을 떄 제기되었던 문제라던가, 그 때 고민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게는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어요. 분명히 우리가 원하는 소리는 따로 있는 거구나 하는. 그런데 그게 뭘까? 내가 원하는 소리라는 것이, 혹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와 관계가 있는 걸까? 사실 제가 이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 여러분들에게 설명이 될 만한 소품을 들고 왔습니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시며) 말로 하는 것보다 들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종(鐘)이에요. (첫 번째 종을 치면서) 이건 소 방울로 쓰기도 했었고, 사립문에다 걸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종을 치면서) 이건 주로 사립문 같은데 걸었고요, (세 번째 종을 치면서) 이건 그 성질(quality) 면에서 조금 의문이 드는데, 진짜 우리나라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서양종을 안 가져와서 비교하는 데 조금 문제는 있지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분명히 이런 게 우리한테 맞는 뭔가가, 정서가 있는 거예요. (피아노를 치면서) 이게 ‘시’하고 ‘파’에요. 증 4도죠? 만약에 이걸 완전 5도로 치면 이렇게 되죠. 서양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는 이런 것이거든요. 완전한 것.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증 4도가 이 종소리와 동질감이 있는지, 아니면 완전 5도와 동질감이 있는지. 분명히 이 이상하게 들리는 증 4도가 이 종소리하고 더 맞지 않아요? (두번쨰 종을 치면서) 이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피치 a에 가까운 소리인데, (피아노를 치면서) 그런데 얘는 완전 5도가 아니라 오히려 4도에서 약간 벗어난 소리와 더 비슷하죠? 제가 어느 날 이런 소리들을 들으면서, 어느 음과 어느 음을 합쳤을 때 이 소리들과 더 비슷할까라는 색깔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이게 단순히 3화음은 아니죠. 아마 귀가 나쁘신 분도 금방 알아들으실 거예요. 우리가 학교에 들어가면 어렸을 떄부터 (<학교종이 땡땡땡>을 피아노로 치면서) 이런 음악을 배웁니다. 비극이죠. 왜냐하면 원래 우리에게 둘러싸인 소리, 우리가 듣고 살던 소리는 자연음에 가까운 그런 소리였는데, 갑자기 이런 정화된 노래를 듣게 되는 거예요. 어렸을 떄 당연히 저건 천상의 소리니까, 하느님이 만든 소리니까, ‘아, 아름답다’ 이러지만, 분명히 우리 한 쪽에는 그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3화음 위에 음악을 쓸려고 할까? 그건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 거고, 우리의 주변과는 전혀 무관한 걸 하고 있었던 거란 말이에요. 옛날에는 중앙 시장에 가면 이런 고물을 파는 데가 많았어요. 제가 어느 날 돈을 조금 가지고 가서 막 별 걸 다 샀죠. 옛날에는 쌌으니까요. 이런 걸 잔뜩 사들고 와서, 내가 이런 소리를 정말 연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음향을 연구해 보고 놀라 자빠진 거죠. ‘아, 내가 이때까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세상에! 이런 소리를 내라고 해야 되는데 왜 나는 도미솔 이런 것을 하고 있었지? 정신이 나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나중에는 왜 우리 민족이 이런 것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건 어떤 음향관계이기도 하고, 소위 말해서 우리가 얘기하는 상생 상극이라는, 상생하기 위해서 이 음향이 부딪혀야 된다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증 4도와 완전 5도가 공존하는 거고, 이런 소리가 있어야 소리가 서로 부딪쳐가며 멀리 가는 거죠. 우리나라 종은 은은하게 멀리 갑니다. 서양종은 가까이서는 큰데 멀리 떨어지면 잘 안 들려요. 소리가 너무 하모닉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소리 안에 들어가면 금방 녹아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리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의 실제나 현실과 달랐고, 내가 그걸 판단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많은 걸 착각하고 있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장구나 징 같은 것도 그런데, 노인 분들한테 여쭤보면 장구를 꼭 완전 5도가 아니라 이상하게 맞춘단 말이에요. 그래서 ‘왜 음정을 꼭 낮춰야 됩니까?’ 물어보면 ‘이래야 소리가 잘 어울리고 좋잖아?’ 그러셔요. 이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징소리가 흔들리면서 ‘더어엉~’ 이러고 가죠? 오뉴월에 황소가 우는 소리 같아야 된다고 하는데, ‘음~’ 이렇게 가는 게 아니라 ‘음~머어~’ 이렇게 갑니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소리는 없죠. 사실은 흔들려야 오래 가는 거예요. ‘차렷’ 이런 것은 일제 시대 얘기죠. 태권도 보시면 알죠? 원래 우리나라 택견은 이렇게 흔들고 있어야지, 가만히 있으면 오래 버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리라는 것도 정제를 해놓으면 멀리 가지도 않고, 오래 울리지도 않고 그러는 거죠. 제가 사물놀이 협주곡 <마당>을 쓸 때는 그런 걸 처음 깨달을 때였습니다. 정말 내가 그동안 미련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고, 정말 이 두 개의 소리를 어울리게 하려면 어떻게든지 소리가 흔들리게 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이 음악의 맨 처음을 보면 ‘시-도’ 이렇게 시작되는데, 이게 징소리일 수도 있고, 농현일 수도 있고, 시김새일 수도 있는, 그러니까 이 음악의 시작은 제게는 상징적으로 ‘살아있는 소리의 흔들림’을 음악으로 만든 것이고, 이게 사물이라고 하는 소리와 만나서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거겠죠. 당연히 이 음악을 만들 때 제일 고민이 되었던 건, 어떻게 소리와 소리를 서로 융화시킬 건가, 그리고 어떻게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줄 것인가 그런 거였어요. 불행히도 사물놀이 하시는 네 분이 그때는 다 악보를 셀 줄도 모르고, 크레센도, 데크레센도 이런 것도 모르고 무조건 두들겨 패는 데만 도사였어요. 정재동 선생님이 지휘를 하셨는데, 당시 이 양반 나이가 지금 제 나이하고 비슷했는데, 서양음악을 워낙 오래 하셨으니까 이해심도 없고 그렇죠. 그런데 어느 날 이 양반이 드디어 알았어요. 네 사람이 악보를 못 본다는 걸 말이에요. 완전히 비밀로 했는데, 그걸 아신 거예요. 거의 한 열흘쯤 연습을 했는데, 어느 날 딱 오시더니, ‘이봐!’, 당시 제 막내 동생 강준택이 서울시향 매니저였는데, ‘악보도 못 보는 놈들을 데려와서 뭘 하라는 거야!’ 이렇게 되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완전히 뒤집혀져가지고 이걸 하느냐 못 하느냐까지 갔다가 어쨌든 공연을 했는데, 하여튼 뭐 처음 공연부터 커튼콜을 다섯 번, 여섯 번 받았어요. 그래서 정재동 선생이 놀라셨죠. 저는 지금도 그 모습을 잊지 않는데, 나중에 서울시향 500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분이 미국에 계시다가 오셨어요. 제가 일부러 사물놀이 협주곡 하나를 새로 지어서 선생님께서 꼭 지휘하셔야 된다고 모셨어요. 그러니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아, 그때는 참 재미있었지. 나도 굉장히 스릴 있었단 말이야’(웃음)라고 하시던데, 그게 역사죠.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김덕수라는 분이 ‘이거 소절을 세야 되는데’라고 하면 ‘아 문제없어요, 선생님. 걱정 마세요, 저 다 할 수 있어요!’(웃음) 이러니 서로 말이 안 되는 거죠. 이 사람은 이게 안 된다고 그러고 저 사람은 저게 안 된다고 그러고. 그런데 요새는 사물놀이도 크레센도 데크레센도, 피아노 포르테 다 가르칩니다. 김덕수 선생이 ‘야, 큰 거부터 작은 거까지 다 쳐야 돼!’ 이러고, 장구채나 북채도 여러 가지를 준비해 가지고 ‘소리를 그렇게 크게 내면 어떻게 해!’ 이러면서 (웃음) 다 하시는데, 옛날에는 그게 안 됐죠. 그 음향이 처음에 결합될 때 얼마나 요란한 소리가 났겠습니까. 폭발하는 순간의 얘기였습니다.
이: 지금 말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선생님께서는 전통의 문제를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계셨어요. 작곡가들이 전통적인 걸 쓴다 하면 흔히 5음 음계나 민요적인 선율을 쓰거나 혹은 패턴화된 장단을 사용하는 식이었고, 이런 걸 가지고 전통적인 모습이라고 해 왔던 것 같아요. 사실 오늘날까지도 그런 모습이 있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마당>에서부터 이미 ― 이 곡이 사물놀이 협주곡이기 때문에 장단의 문제도 물론 많이 고민하셨겠지만 ― 우리의 소리가 갖는 독특한 울림 그런 문제를 계속 찾아나가셨단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게 굉장히 어려운 건데, 서양 악기를 가지고 서양 악기가 많이 내지 않았던 종류의 소리를 만드는 거거든요.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그런 고민을 하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 작품을 들어보면 뭔가 독특한 질감의 소리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사실 현대음악에서는 그런 작업을 많이 하죠. 선율이나 음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사운드 그 자체를 다각도로 고민하는 건데, 그걸 선생님께서 굉장히 일찍부터 구체적인 주변의 소리들을 통해서 찾으시려고 한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평균율 악기인 피아노를 가지고 그 유사한 소리를 찾아가는 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을 텐데, 그런 걸 계속 해 오셨던 겁니다. 그럼 여기서 2000년도에 씌어진 관현악곡 <천년천세>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4부로 이루어진 곡인데, 15분 정도니까 전체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관현악곡 <천년천세>(2000) 감상
작곡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이: 작품얘기를 구체적으로 하다보면 선생님의 작곡에 대한 생각이 좀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작곡가로서 고민하시는 문제나 작품을 쓰실 때 어떤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그런 작곡의 과정을 조금 설명해주시면, 여기 작곡과 학생들도 있고 하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강: 우선 곡을 조금 설명하면서 얘기를 해보죠. <천년천세(千年千歲)>는 새로운 천년에 즈음해서 쓴 곡인데, 뭐 알다시피 천년지복(千年之福)이라고 이제는 싸우고 하는 천년이 아니라 성숙한 천년을 맞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음악은 우리의 정악, 속악, 무악으로 이어지는 그런 것들이 다 나옵니다. 앞의 첫 도입부는 <수제천>에서부터 <무령지곡>으로 이어지다가 <취타> 주제가 나오는데, 그건 하늘이 열리고 이 땅 위에 치세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는 소박한 ‘아침이 열리도다’ 하는 네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 음악의 전체적인 양식들을 조금씩 도입해서 그러한 맛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음악이 가지고 있는 어떤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주려는 뜻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제 우리가 새천년을 맞았을 때 정말 상징적으로 이런 음악을 꼭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겁니다. 우리 음악에는 아시다시피 악(樂)만 있는 게 아니라 예(禮)도 있죠. 예와 악이 이제 음양(陰陽)으로, 율려(律呂)로 이렇게 연결됩니다. 즐거워만 하면 안 되니까, 즐겁지만 격을 지녀야 하는 거죠. 우리가 질서를 지켜야 되고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하듯이, 말하자면 악/락(樂)이 있으면 거기에 예(禮)가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정악(正樂)과 속악(俗樂)은 사실 반드시 같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정악적인 것, 길고 지루한 음악을 싫어하잖아요. 할 수 없이 연주회장에 끌려가면 대게 그런 건 오프닝으로 하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콘체르토나 그런 걸 듣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처음에 듣고 앉아 있겠죠. 그런데 사실 이것도 하나의 연습(practise)이 조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작곡가들은 너무 관객한테 주눅이 들어가지고 관객이 싫어하면 무조건 겁을 내는데, 그럴게 아니라 이것도 관람객들에게 연습을 시켜야 되거든요. 즐거우려고 왔으면 너희도 예의를 지키는 법을 연습을 해라, 들어와서 조용히 앉아 있어야 되고, 핸드폰도 꺼야 되고, 그런 것을 다 지켜야 되듯이, 음악 안에서도 정제된 것과 즐거움을 같이 지켜야 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서 꼭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뭐냐면 첫째로, 우리 조상이 내려준 음악보다 고귀하게 보여야 되겠다 라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은 뭐 조금 야하고 그런 음악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러면 조상님들에게 제가 죄송하다고 기도도 하고 이번에는 꼭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웃음) 제 얘기는 되도록이면 그 격조가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좀 더 성숙한 나이가 되시면 예(禮)나 격(格)에 대해서 왜 이게 필요한가를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비싸게 팔아야 되는 거잖아요. 서양 애들이 지금 값싸게 막 자기들을 팔아먹고 있는 거 아시죠? 서양음악도 아주 완전히 길바닥 저 밑에까지 떨어졌습니다. 옛날의 마에스트로나 대가들은 다 없어지고, 이제는 그야말로 그냥 속옷이나 입고 나와서 바이올린 하고 그러잖아요? (웃음) 아주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는데, 그런 것을 우리 국악 하는 사람들이 흉내를 내니, 참 놀랄 일이에요. 흉내 낼 것이 따로 있지. 그런 저속한 생각을 가지고 하려면 예술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차라리 처음부터 스트립쇼를 하던가. 그런 건 예술이라고 얘기하면 곤란하죠. 그래서 저는 음악을 만들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품격과 격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만이 꼭 바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에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좀 못돼가지고 뭐든지 지긋지긋 해야 됩니다. 아주 맵기도 해야 되고 짜기도 해야 되고. 그러니까 우리나라 음악은 뭔가 감성적으로, 요즘 말로 해서 화끈하게 뭔가를 경험해 주지 않으면, ‘뭐 이런 게 있어’ 그러죠. 저는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것, 어떻든지 나눌 수 있는 뭐 그런 음악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원칙들을 꼭 지키고 싶은 거죠. 음악이 어렵고 쉽고 하는 문제는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음악이 음악으로만 들으면 어려운 점도 많죠. 그건 저도 인정을 하지만, 모차르트도 한 이야기가 있어요. 다 알아듣는 음악만 해주면 나가서 반드시 뭐라고 한마디씩 한다는 거예요. ‘거 되게 시시하구만’ 뭐 이렇게. 조금 모르는 음악이 한 4분의 1쯤 들어가야 ‘어~ 이거 멋있었어’ 그러고 나간대요. 정말 참 웃기는 얘기 같지만 사실은 인간들에게 그런 호기심이 다 있습니다. 뭔가가 있어야 그것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그걸 잡으려고 하는 그런 힘이 발동되는 거지, 그걸 다 보여주면 ‘아무것도 없어?’, ‘웃기더구만’ 이렇게 꼭 다음에 뭐가 붙는단 말이죠. 암튼 이런 것들이 제가 작곡을 하면서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곡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작곡을 하려는 후배들에게 꼭 얘기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계획과 생각 이런 걸 많이 하라는 것인데, 그걸 많이 해놓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써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가는 건 정말 곤란하잖아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해보자!’(사람들 모두 자지러짐)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왜냐면 작곡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뭐 정말 뜬구름 잡는 거거든요.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겁니다. 언젠가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스티븐 호킹이라고 하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시간의 역사』라는 책에서 쓴 일종의 자서전 같은 독백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론 물리학자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 종이 한 장을 달랑 놓고 밤새도록 앉아 있다가 새벽이 되면 그냥 잔다. 그 다음날 또 흰 종이를 두고 나는 뭐하는 사람일까, 그러면서 나는 흰 종이 하나 밖에 쓸 수 없나’, 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근데 작곡가도 다를 게 없어요. 사실 새로운 곡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건 뭐냐면, 역시 또 나는 길을 잃어버렸구나, 난 어디서 시작을 해야 되지 그런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많은 계획을, 자기가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게 먼저 많은 계획을 세워 놓고, 그러고 나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쓰라는 거죠. 그래서 저는 스케치를 많이 합니다. 그 스케치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떤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겁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거예요. 어느 날 굉장히 급박한 어느 순간에 너무나 멋있는 말을 했어요. ‘어 나는 말이야 안타까워 죽을 뻔 했어’ 이럴 때 ‘아니 내가 안타깝다는 말을 했어?’ 뭐 이렇게 말이죠. 그렇듯이 우리가 어느 순간에 아주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어떤 착상을 하게 되는데, 그 착상이 바로 스케치인 거예요. 이 스케치를 반복적으로 하면, 그 스케치의 세계 안에서 다시 스케치에 들어가고 그러는 거죠. 여기서 내가 만약 ‘즉각적’이란 말을 하나 꼭 살리고 싶은데, 다시 ‘즉각적’이란 말이 살아날 수 있는 그 뒤 배경은 뭔지 또 스케치를 해서 곡에 들어가는 스케치를 하면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살려내고, 또 그걸로 살려내고, 또 살려내고 하다보면 어떤 형체를 만들게 되요. 현대물리학을 아시는 분은 아마 프랙탈 이론이란 걸 들어보셨을 거예요. 우리의 의식이라는 게 사실은 점점 가지를 뻗어서 새로운 어떤 것을 형상적으로 구축해 나간다는 게 요즘 현대 물리학의 한 경향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제 말을 깊이 생각해보면 아마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걸 포기하지 말고 자기의 생각을 그 관점에서 다시 보고 다시 보고 다시 봐서 점점 그 생각을 형상화해나가야 되는데, 문제는 여기에 몇 가지 숨겨져 있는, 말하자면 내부의 적이 있죠. 그 첫 번째 적이 뭐냐면 약간의 치매 현상이에요. (또 한 번 사람들 자지러짐) 일종의 기억력.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판단력입니다. 기억력이라는 것이, 내가 지금 딱 생각이 나서 적어뒀는데, 나중에 보고도 몰라요. (웃음) 내가 이걸 왜 적었지? 사실 그 순간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나중에 다시 봤을 때, 지금 상황보다 더 냉정하게 의식의 수준이 올라가야 된다는 겁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꼭 새벽에 등산을 하고 아침에 들어와서 커피를 한잔 잘 먹고 한 30분쯤 명상을 한 다음에 어저께 스케치 해 놓은 것을 다시 봅니다. 꼭 그렇게 다시 쭉, 냉정한 눈으로 보는 거죠. 내가 제정신으로 했나, 어제 내가 미친 소리를 안했나… (웃음) 그건 꼭 아침에 해요. 스케치를 들여다보고 고치고 하는 것은 꼭 오전에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되도록이면 테이블 워크(table work)를 해요. 그냥 지성이 필요로 하는 일, 또는 노동이 필요한 일들을 주로 오후에 하는 거죠. 이 두 가지 작업이 다 중요해요. 그래서 제가 꼭 하고 싶은 얘기는 여러분들도 반드시 명상을 하라는 겁니다. 이걸 훈련하지 않으면 이 두 가지 능력을 지속할 수가 없어요. 사실 명상을 해야 사람의 의식이 백지상태로 돌아오니까, 똑바로 보인단 말이에요. 우리가 보통 때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자기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똑바로 보이지를 않아요. 자기가 잘 써놓은 스케치를 술을 먹고 들어와서 보고는 ‘내가 바보지, 왜 이렇게 썼나’ 하면서 엉터리로 고쳐 놓는단 말이에요. 그 다음날 보면 기가 막힌 거죠. 세상에 이것도 고쳤다고 고쳤나 세상에… 사람의 의식이 그렇게 순간순간 바뀌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이 순간순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데, 자신은 순간순간 정지되어 있다고 생각하죠? 아닙니다. 수도 없이 흔들리고 있어요. 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연주가들이 저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선생님 저는 왜 한 번도 뜻대로 연주를 못하는지 몰라요.’ 그러면 제가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웃기지마. 원래 작곡이 그렇게 되어있는데, 너라고 무슨 수가 있냐.’ 작곡도 어느 순간, 그 순간을 잡은 거예요. 그 다음날 보면 또 다른 것을 잡을 수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래, 그냥 그저 인생이 이러려니 하자. 여기서 끝내자’ (또 자지러짐) 이래야 되는데 그걸 놓고 ‘아, 나는 바보 인가봐 또 고치네.’ 그게 끝도 없죠. 끝이 없어요. 사실 더 고친다고 더 좋아지는 건 아니에요. 그것도 하나의 집착입니다.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오늘 이 순간에 직시하는 대로 연주를 하면 되는데 그걸 또 고민해요. ‘아, 난 또 거지같이 연주를 했나봐.’ 그게 아니라 그 순간에 믿는 바대로, 그 자체가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순간에 내가 가장 진실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췄는가 하는 것이고, 일단 그 작업에 만족해야 됩니다. 그 순간에 만족해야 해요. 사실 마지막 작업을 할 때는 되도록이면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작업을 해야 되거든요. 그게 잘 흘러가도록 해 놔야 되는데, 마지막에 갑자기,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지막에 굉장히 바빠요. 아이디어가 막 생기고 해서 잘된 곡을 이래저래 고쳐서 이상하게 만들어놓는 그런 경우가 사실은 많아요. 제 얘기에서 여러분들이 조금 도움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제가 꼭 하고 싶은 질문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오늘 우리가 선생님의 오케스트라 곡을 두 개 들어봤는데(물론 하나는 협주곡이었지만), 사실 선생님께서는 실내악곡을 굉장히 많이 쓰셨어요. 그런데 그 실내악곡을 그냥 쓰신 게 아니라 다 주변에 그 곡을 연주할 연주자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 작품은 보통 연주자들이 부탁을 해서 쓰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선생님 실내악곡을 하나 들어보고 질문을 했으면 하는데, 2001년 작인 첼로와 피아노, 장고를 위한 <해맞이 굿>입니다. 이 작품은 첼리스트 요요마가 주도했던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위촉되어 초연된 곡인데, 비 서구 작곡가들한테 그 나라 전통 악기와 첼로가 포함되는(요요마 자신이 연주를 해야 되니까) 편성으로 위촉된 것입니다.
♫ <해맞이굿> 2악장 “아우름” 감상
이: 이 곡의 편성이 서양악기와 국악기, 그러니까 첼로와 피아노, 그리고 장구 이렇게 세 악기로 되어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서양악기와 국악기가 함께 나오는 곡을 많이 쓰셨어요. 작년에 해금과 바이올린 및 국악 관현악을 위한 곡도 나왔고(그건 오케스트라 곡이긴 하지만), 가야금과 현악사중주를 위한 <素琴曲>이라는 곡도 쓰셨고요. 그러니까 매 곡에 따라서 악기 편성도 달라지고, 그러면서 곡의 컨셉 등도 달라질 것 같은데, 어떤 편성인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서도 굉장히 다를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주자와의 관계에 대해 조금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연주자와의 관계
강: 저는 연주자의 역할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연주자가 그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음악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도 그 사람이 그걸 불어넣지 않으면, 그게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못 얻죠. 저는 연주가로부터 두세 가지를 항상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열정이나 그런 생활이 저에게 음악을 쓰고 싶게 만드는 어떤 힘이 되기를 굉장히 바래요. 제가 연주가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연주가도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삶의 방식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무조건 막 열정만 가지고 해보려는 사람도 있고, 그냥 해야 되니까 하나보다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연주가니까 당연히 창작곡도 잘하겠지’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지고 연주를 엉터리로 하는 연주가들도 많이 만나 봤습니다. 참 기가 막히죠. 그건 이런 경우하고 비슷합니다. 아주 아름답게 생긴 여자를 만나서 정말 우아하게 저녁식사를 한번 먹어보려고 그러는데, 그 여자가 앉자마자 ‘아 사실은요, 제가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이러면서 완전히 밥맛 떨어지는 얘기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서로 착각하는 것이죠. 그렇듯이 연주가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연주를 이 정도 잘하는데 뭐 당연히 잘할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되면 함께 예술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제 주위에는 정말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연주자들이 많아요. 많은 연주가들이 저에게 와서 곡을 좀 하나 써주세요 그러는데, ‘너 말고도 주위에 곡을 써주고 싶은 사람이 너무나 많아’ (웃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제게는 정말로 저랑 가까운 연주자가 너무 많은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같이 살아있고, 같이 숨쉬고, 같이 공감대를 느끼고 있는 연주자, 우선은 그런 연주자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연주자들과 같이 자신의 음악을 해나가는 게 삶의 기쁨이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같이 호흡해 나간다면, 이처럼 작곡가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아직도 ‘창작음악을 꼭 해야 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제는 굉장히 많은 연주가들이 아주 의욕적으로 연주를 잘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런 문제는 줄어들고는 있지만. 어쨌든 저는 이렇게 교감을 하지 않는 연주가하고 연주하는 것은 안하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참 하루하루가 너무나 귀중하고 소중하고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작곡가가 작품을 하나 만든다는 건, 자기 뱃속에서 아이를 키우듯이 어떤 때는 두 달도 좋고 석 달도 좋고 정말 고통을 받아서 만드는 건데, 그렇게 만들어가지고 어느 한순간에 그냥 우습게 하늘로 휙 날라 가 버리는 그런 일을 겪으면 ‘아 이게 진짜 내가 할 짓인가’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되죠. 정말 애지중지 하는 애를 갖다 줬는데, 그 애를 휙 던져놓고 ‘어 나 밥 좀먹고. 잠깐 기다려’ 이래보세요. 그러면 ‘야, 너 우리 집 아이를 뭘로 아는 거야’ 이렇게 사람 같으면 진짜 칼부림 날판인데, 그렇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런 문화에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작곡가가 밤낮 연주가한테 가서 ‘근데요 저 곡을 썼는데요’(웃음) 뭐 이렇게 참…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말도 안 되죠. 저는 작곡가가 모든 예술적인 행위를 이끌어 가야 되고, 작곡가가 그걸 만들어 주는 사람, 그 위에서 연주가들이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적으로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내가 만들어준 작품을 가지고 나와 더불어 이렇게 참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래야 되는데. 서로 뭐 신세지고, 원수 같고 이래선 안 되는 거죠.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네. 정말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얘기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사실 이건 대담자인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인데요. 아까 선생님께서 얼핏 한반도를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물관에 가야 된다는 말을 듣는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오히려 선생님이 박물관에 가셔야 되는 이유는, 그러니까 그 정도로 귀하다는 의미는 평생을 ‘전업 작곡가’로 살아오셨다는 점에 있다고 봅니다. 작곡가라는 존재가 원래 작곡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렇지만 전업 작곡가로 살아가는 것은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너무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서 대개 대학 등지에서 직업을 구하죠.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이 딴 직업을 가지면 그 일을 또 해야 되잖아요. 대학에서 돈을 받으니 작곡도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제에도 집중을 해야 되거든요. 물론 선생님께서도 오랫동안 작곡이나 음악을 가르쳐 오셨지만, 어떤 제도 안에서 다른 직업을 갖지 않으시고 평생을 작곡하는 문제로 살아오셨다는 것이 제게는 굉장히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선생님 얘기에서도 나왔지만 매일 아침 등산하고 오셔서 작곡으로 하루를 시작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직업이 작곡인 거죠. 수십 년 간을 꾸준히 이렇게 작곡으로 살아오신 분의 고민을 우리가 접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강준일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제 마지막 질문은 ― 아주 막연한 것일 수도 있는데 ― 작곡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도대체 뭐냐 하는 겁니다. 사실 전업 작곡가로 살아간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뭐 저도 음악하고 공부하는 학자니까, ‘나도 음악학을 하면서 평생을 살겠다’라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사이사이에 참 많은 길들이 있고, 그런 와중에서 나의 학문적인 문제의식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거든요. 그런데 강준일 선생님을 보면, 그렇게 그냥 살아가시는 분이기 때문에 모델이 된다고 할까, 희망이 된다고 할까, 뭐 그래요. 하여튼 선생님에게 작곡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뭔지 그런 얘기를 마지막으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작곡가로 살아간다는 것
강: 그러니까 제가 40대를 넘어서 한 마흔 서넛쯤이었을 때 깨닫게 된 게 있어요. 참 웃기는 얘기지만, 아까 들은 그 사물놀이 협주곡을 쓰기 전 해에 제가 <만가>라고 하는 작품을 쓰고 나서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그게 82년이고 그 다음에 사물놀이 협주곡을 쓴 건데, 저도 몰랐는데 기자들이 찾아와서 그러더라고요. ‘아 요즘 스타가 되신 기분이 어때요?’ 그래서 난 내 얘기가 아닌 줄 알고 ‘무슨 말씀이에요? 누가 스타가 됐어요?’ 이랬더니 ‘아 이 사람 봐!’ 막 그래요. 그 때 제 나이가 이미 서른여덟, 아홉 이랬을 때거든요. 소위 말해서 참 내놓으라 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물리학을 한다고 날뛰던 20대도 날라 가고, 30대도 다 날라 가고. 제 딸들이 있는데 ‘아버지 뭐하시니?’ 그러면 ‘우리 아버지 그냥 놀아요’ 그랬죠. (웃음) 정말 우리 딸들한테 물어보면 알아요. ‘우리 아버지 그냥 놀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딸들의 특징이 ‘어 뭐가 이상하지? 왜 사람들이 이상하다 그러는 거야’ 그래요. 그런데 마흔 서넛쯤 되었을 때 어느 날 ‘아 내가 이렇게 내놓으라 하는 작곡가가 되었다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딱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뭘 깨닫게 되었냐면, 나는 뭐든지 다 떨치고 갈 수 있다, 내일이래도 돌아와라 그러면 갈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 잠깐, 제가 말이죠, 생각한 곡을 못 쓴 게 있거든요’ 이런 말이 꼭 나올 것 같단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왜 나는 다 버릴 수 있는데 이걸 못 버릴까’ 그래서 이제 한 2년 쯤, 정말 제 삶에 있어서 음악이 뭔가를 명상을 했습니다. 항상 명상을 할 때마다 한 5분 10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음악과 관련된 것이 뭐가 있는가를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굉장히 많이 놀랐죠.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다 잊어 버렸는데, 하여튼 음악에 관한 기억은 머릿속에 다 있는 거예요. 뭐 네 다섯 살 때 들었던 음악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만약 음악을 안 하고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중에 죽을 때 하느님이 ‘너 이번에 가서 뭐하고 왔니’ 그러면, ‘음악에 대한 기억밖에 남는 게 없는데요.’ 이럴지도 모를 거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음악에 대한 기억은 다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비로소 ‘왜 내가 이걸 못 버리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내가 음악이 아니면 내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않는 그런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음악을 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내가 작곡을 못하니까 바보 같다는 생각도 하고, 내가 이렇게 점점 기억력이 짧아지면 안 되니까 명상도 해야 되겠고. 하여튼 삶의 모든 문제가 가만히 보면 음악 하나를 해 보려고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드는 생각이, 어쨌든 내게는 음악보다 더 어려운 건 없으니까 음악을 빼놓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안 된다, 이런 철학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어디 있어요. 정말로 미련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깨달은 게 ‘아 이게 바로 내 천업이로구나’ 라는 겁니다. 제가 아주 뒤늦은 나이에 음악원에 와서 관현악과 수업을 한 10년 맡게 되었어요. 사실 제 딴에는 관현악곡을 쓰기 위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생각도 있고 해서 아무도 안 맡겠다는 걸 아주 흔쾌히 제가 맡았는데, 한 10년을 공부하고 참 깨달은 게 많습니다. 그게 뭐냐면 ‘세상에 참, 잘 얻어먹고 잘 산 작곡가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참 뒤늦게 알게 된 거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위대한 작곡가라는 게 정말로 성한 놈이 한 놈도 없구나. 내가 이걸 진작 깨달았어야 되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제가 요새 농담도 하면서 하는 얘기지만, 만약 하느님한테 가서 ‘아 하느님, 베토벤 정말 너무 하잖아요. 저렇게 불쌍한데 얘를…’ 그러면 하느님이 ‘야, 얼마나 멋지냐. 저놈이 귀머거리인데 저렇게 위대한 곡을 썼잖아. 내가 얼마나 멋있는 놈을 만들었니.’ 틀림없이 이럴 거란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그걸 생각하고 깨달은 게, ‘아 이게 진짜 자기 인생과 바꾸는 거로구나’라는 거였어요. 말하자면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러 온 놈은 이번 생에 별 볼이 없이 온 거로구나’라는 걸 깨달았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정말로 우리가 뭘 좀 하려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되겠구나. 그래서 작곡이 아닌 뭔가를 생각하기 힘들었고,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지만, 어차피 이판사판이고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인데, 그냥 이 길로 한번 가보지 뭐 이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뭐, 모르겠어요. 제게도 여러 번 그런 문제가 있지 않았겠어요? 좋은 직장도 있었고, 좋은 제안도 많았었고. 그런데 그럴 때마다 꼭 두 가지 현상이 있었단 말이에요. 잘 될 것 같으면 내가 싫다 그러고, 내가 해볼라 그러면 딱 그게 안 되는 거예요. 하여튼 뭐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제가 그런 얘기 여러 번 했지만, 작곡을 하려고 하면 항상 문이 열려있고, 다른 것을 하려고 하면 문이 딱 닫히는 것 같은. 꼭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조금 고민하다 딱 돌아서면 금방 닫혀있어요. ‘아까 열려 있었는데? 내가 돌아서면 왜 꼭 닫히지?’ 그래서 ‘이게 내가 살아가야 되는 길의 숙명이로구나.’ 그런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근데 지금 나이 들어서 생각해보니까, 뭐 이제 끝날 시간이 됐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인생 후면에서 참 많은 걸 깨닫는 거로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실은 제가 오늘 국민연금을 신청하러 갔어요. 서류를 짧은 시간 안에 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러 갔는데, 저는 거기 있는 젊은 사람이 무슨 말 한마디라도 해줄 줄 알았어요. ‘아 이제 나이 드셔서…’ 라든가, ‘이걸 못 받으시겠네요.’ 라든가, 또는 뭐 ‘그동안 많이 내셨으니까 받으실 때도 되었네요.’ 라든가. 그런데 다 끝나고 아무 소리도 않고 십 분 정도 있더니 ‘이 달 말부터 찾아가시면 되겠네요.’ 그리고 끝이에요. ‘그냥 가시죠.’ 이러는 거예요.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인생의 끝도 아마 틀림없이 이럴 것이다. 굉장히 멋있게 끝날 줄 알았는데, 대충 오늘 돌아가시죠 뭐 이런… (사람들 자지러짐) 사실은 제가 상당히 의미 있게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얘기는 이거예요. 자기 삶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면, 모든 걸 다 던지고 정말 여러분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사세요! 체면 불가하고 정말 오늘 당장 가서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그냥 사셔야 됩니다. 거기에 용기, 뭐 보통 붙는 미사여구, 그건 다 위로의 말들이고. (웃음) 사실은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어요. 그렇지만 그것처럼 신나는 게 또 어디 있겠어요. 그렇잖아요? 그냥 여러분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데. 왜 얘는 뭐하나 쟤는 뭐하나, 괜히 시간만 나면 핸드폰으로 물어보고 ‘뭐하니?’ (웃음)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돈만 나가지. 정말로 제가 인생의 후면에 와서 깨달은 거는 ‘맞아. 정말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거로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살면 되는 거구나’ 라는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주제가 아니에요. 제가 항상 후배들보고 하는 얘기가, 취직하고 애 낳고 시집가고 그런 것들은 인생의 주제가 아니다, 밥 벌어 먹는 건 인생의 주제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건 누구나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여자들, 뭐 이 자리에도 많이 있지만, 한 스물 두세 살만 되면 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서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한 십 년씩 서있어요. ‘너 뭐하니?’ 그러면 ‘아직 시집을 못 갔어요.’ 아 그렇게 십 년이 날라 가는데 아깝지 않아요? 난 정말 너무나 아까워요. 근데 제가 여러 번 얘기했어요. 결혼하는 건 인생의 주제가 아니라니까. 60억 인구가 다 어디서 나왔겠어요? 여자가 다 낳았는데, 다 시집가서 낳았을 것 아니겠어요? 뭐 안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웃음) 그걸 인생의 목적으로 살다니, 세상에! 그건 인생의 목적이 아니거든요. 남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취직하고 군대 갔다 오고 이런 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에요. 인생의 목적은 여러분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제가 꼭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이: 네, 오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박수로 이 자리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수)
『insidemusic V』 (2005.6), 3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