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숙 – 나의 작품 세계」(2005.03)

이 글은 2005년 3월 25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금호아트홀에서 열렸던 스페셜 렉처 ‘작곡가 진은숙의 음악 세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강연에서 진은숙은 2005년 2월 발매된 도이치 그라모폰 현대음악 시리즈 2021 음반과 2007년 초연 예정인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스케치를 중심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했다.
(정리: 이희경)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이렇게 만나 뵙고 제 작품을 소개해 드릴 수 있게 되어 정말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작곡공부를 했지만 작곡가로서 중요하게 성장했던 그런 시기를 독일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동안 한국청중들과 만날 기회가 너무 없었고, 한국에 와서 제 작품을 소개할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여기오신 분들 대부분은 (몇몇 작곡가를 제외하고는) 제 작품을 한 번도 들어보신 적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1985년에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거의 한 20년 되었는데, 관현악곡, 협주곡, 앙상블곡, 전자음악 등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있어도 작품의 전체 수는 18~20곡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제가 1년에 딱 한 곡 내지 한 곡 반을 쓰고 있거든요. 작품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작품 쓰는 수를 한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전체 곡수는 많지 않은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큰 협주곡이나 관현악곡 등은 소개해 드리기가 힘들 것 같고, 이번에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에서 출시된 음반에 포함된 앙상블곡 네 곡과 지금 현재 작업 중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페라 프로젝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음반에 들어있는 네 곡의 앙상블은, 1991년부터 2002년까지, 그러니까 작곡가로서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했던 시기에 씌어진 곡들입니다. 그런데 이 곡들을 이해하시려면 저의 작곡가로서의 배경 같은 것을 조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작곡가로서의 배경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난 후 1985년에 저는 함부르크로 리게티 선생님에게 유학을 갔습니다.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콩쿠르에서 상도 타고 해서 약간은 자신만만한 그런 마음으로 유학을 갔는데, 리게티 선생님이 저의 작품을 보더니 처음부터 “이것은 너의 언어가 아니다. 그러니까 너는 네 말을 해야지 남의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런 굉장히 추상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그 당시 저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고,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몰라 완전히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에 있으니까 여러 가지 현대음악 페스티벌들도 많이 참관하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그다지 만족을 얻지 못했어요. 그때 현대 음악제들을 보고서 제가 받은 인상은, 너무나 많은 가능성들이 있고 너무나 많은 짓들이 있는데, 말하자면 여러 종류의 음악들이 있고 12음 기법에서 시작하여 소음까지 와서 해프닝을 하고, 심지어는 피아노를 두드려 부수는 것까지 했는데, 이제는 저것 이상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신기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한테 힘들었던 것은, 만약 내가 유럽사람 혹은 독일사람이었다면 쇤베르크나 베베른에서 오는 그런 전통이 있기 때문에 오리엔테이션을 하기가 쉬었겠지만, 나는 출신이 달라서 마음 한구석에선 내가 원하는 음악이 저건 아니다라는 믿음이 있으면서도 살려달라고 붙잡을 수 있는 그런 작곡의 전통이 제게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제가, 새로운 것을 한다거나 작곡가가 오리지널해야 된다거나 하는 식의 리게티 선생님이 주장하셨던 말들을 굉장히 단편적인 차원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남이 안 하는 것을 해야 된다는 식의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1986년부터 89년까지 3년간 작곡을 완전히 그만두고 곡을 쓰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저한테 정신적으로 또 힘들었던 것은, 리게티라는 대가가 저한테 주는 중압감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금까지도 작곡을 할 때 음을 한 음 쓰면 그분의 올빼미와도 같은 광채를 가진 그 눈을, 그 시선을 의식하고 있거든요. 아마 평생 저를 쫓아다닐 것 같아요. 그런데 모든 대가들이 그렇듯이 그분 주변에는 항상 그분 제자들과 자칭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제게 항상 리게티와의 관계에서만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저는 굉장히 어린 나이였는데도 내가 정말로 작곡가로서 제대로 서려면 ‘나’이어야지 리게티 제자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1988년 그분이 정년퇴직하시면서 저희 클래스의 다른 학생들은 다 그분 제자로 계속 남아서 레슨도 받고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는데, 저는 그때 그분을 떠나서 베를린으로 이사를 왔고, 리게티 제자로서가 아닌 내 자신으로서 제 인생을 구축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의 공백 기간 후 처음 쓴 앙상블 곡이 도이치그라모폰 음반의 첫 곡으로 실려 있는 <말의 유희>입니다. 이 곡을 쓰면서 처음에는 참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피아니스트가 3년 동안 피아노를 안친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거든요. 작곡가가 펜을 놓고 곡을 안 쓰면, 그다음에 시작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때 아주 힘들게 시작하면서 굉장히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새롭다’는 개념도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전에 저를 절망스럽게 했던 현대음악계의 상황, 정말 너무나 많은 것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전혀 새로울 수 없다고 그렇게 절망했던 그 상황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여지면서, 정말 어떻게 보면 우리 시대만큼 이렇게 음악적인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는 시대가 있을까라는 식으로, 그 상황 자체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을 다 포용해서 나의 내면의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독일 출신이 아니고 한국 출신이라는 것도 그전에는 굉장히 힘든 요인이었는데, 그것을 바꿔 생각해보면 한국에는 사실 작곡의 전통이 아직 길지 않고(윤이상 선생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아직까지는 굉장히 짧은 전통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으로서 작곡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면서도 훨씬 더 가능성이 많고 자유스러울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1985년 리게티 선생님께 갔을 때 그분이 하신 “너만의 언어를 찾아라” 하는 그 한마디가 제게는 그때까지 제가 모르고 있던 어떤 큰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신 것이었던 같아요. 저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그에 앞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음반에 들어있는 네 개의 앙상블 곡은 이런 제 음악적 사고가 쌓여가고 작곡가로 성장하던 아주 중요한 시기에 작곡되어진 것들이고, 제 음악적 사고의 변화를 대변해주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네 개의 앙상블곡들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말의 유희 Akrostichon-Wortspiel> (1991/1993)

이 작품은 1991년도 작곡된 것으로, 당시 네덜란드의 ‘뉴앙상블(Niew Ensemble)’이 가우데아무스 작곡 콩쿠르에서 80년대에 1등한 작곡가에게 위촉을 해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 때 위촉받아 쓴 곡입니다. 그런데 이 뉴앙상블의 편성이 굉장히 특이해요. 보통 악기들도 있지만 기타, 만돌린, 하프가 포함되어 있어서 뜯는 현악기들이 굉장히 중요한 앙상블입니다. 이 곡도 보통의 앙상블 편성과는 달리 만돌린을 포함하는 조금 특이한 편성으로 되어있어요. 1991년도에 다섯 곡을 작곡했는데, 다섯째 곡이 마음에 안 들어 연주직전에 취소시키고 네 곡만 초연했고요, 2년 정도 뒤에 아무래도 이 작품에 아쉬움이 많아서, 세 곡을 더 붙여 일곱 곡으로 완성하여 런던에서 초연을 했습니다. 이 곡은 동화에서 따온 주제로 만들어졌는데요, 제가 리게티 선생님에게서 공부할 때 리게티 선생님이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특히 거기에 나오는 넌센스나 그런 상황들에 굉장히 매료되어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저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 그 얘기들을 많이 읽었어요. 앨리스 이야기에서 음악적으로 번역 가능한 몇 장면을 뽑고,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서도 음악적으로 번역 가능한 장면을 뽑아서 일곱 곡을 만들었습니다. 각 곡의 성격은 굉장히 다른데요.

첫 곡 “숨바꼭질”은 약간 미스테리한 것이고, 둘째 곡은 “세 개의 마법의 문의 비밀”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어요. “시간을 거꾸로”라는 제목의 셋째 곡은 각 악기들이 서로 상관없이 거의 독주악기처럼 막 연주하다가 곡의 중간부터는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마치 곡의 중간에 거울을 갖다 놓은 것 같은 그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넷째 곡 “5절로 부르는 사계(四季)의 노래”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내는 거의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 악기들이 내는 휘파람 소리나 특이한 타악기 소리들이 합쳐져서 굉장히 이상한 음향을 만들어 냅니다. 다섯째 곡 “도미파레솔”은 ‘도레미파솔’의 솔페이지 계명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음에 맞는 계명을 노래로 부르다가 중간부터는 제대로 된 계명이 아니고 계명을 가사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를 부르면서 ‘미’를 노래해야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노래 부르는 분들이 굉장히 힘들어하는 곡입니다. 여섯째 곡은 “임의의 놀이”로 ABCD를 가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ABCD는 미하엘 엔데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장면을 뽑은 건데요. 주인공이 어디를 갔는데 거기서 엄청난 의미를 가진 메시지를 받게 되요. 그런데 그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알파벳만 나열되어 있는 그런 메시지였어요. 거기에서 받은 인상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곡 “옛날 옛적에”는 제목처럼 굉장히 옛날 음악 같은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프라노와 열 명의 주자를 위한 앙상블 곡인데, 이 곡에서 중요한 것은 가사입니다. 제가 동화에서 뽑은 장면들에서 텍스트를 가져왔는데, 어떤 식으로 텍스트를 만들었냐 하면, 자음을 뺀다든가 모음을 뺀다든가 아니면 단어를 거꾸로 읽는다든가 혹은 거기에다 무엇을 첨가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원래 있던 오리지널 텍스트하고는 거의 상관없는, 그러니까 인공적인 언어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들으시는 분들도 발음은 들어도 그 말뜻은 모르실겁니다. 왜냐하면 의도적으로 구체적인 단어가 구체적인 메시지를 청중들한테 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러니까 단지 언어라는 것을 노래 부르는 도구로만 사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 곡들 중에 몇 곡을 들어보겠는데요. 물론 여기 오신 분들 가운데에는 이 곡을 아시는 분들도 많고 아니면 음반에서 들으신 분들도 많겠지만, 아직 음반을 안 사신 분들과 앞으로도 안 사실 분들을 위해서 일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넷째 곡 “5절로 부르는 사계의 노래”는 아주 단순하게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겨울의 추운 으시시한 분위기이고, 다섯째 곡 “도미파레솔”에서는 겨울 다음에 봄이 옵니다. 그리고 여섯째 곡 “임의의 놀이”는 아주 경쾌한 음악입니다.

♬ <말의 유희> 제4곡~제6곡 감상

지금 들으신 이 곡들이 실린 도이치 그라모폰의 음반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굉장히 집중적으로 같이 일하는 앙상블이 피에르 불레즈가 창단한 파리의 ‘앙상블 앵테르콩템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입니다. 1993/4년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일을 해오고 있는데요. 이미 세 곡을 위촉받아 작곡을 했고, 현재 쓰고 있는 곡도 그 앙상블의 위촉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음반에 들어가 있는 곡들은 <말의 유희>만 빼놓고는 모두 ‘앙상블 앵테르콩템포랭’의 위촉곡입니다. 이 음반은 사실 3년 전부터 계획되었던 건데요. 처음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이 아니라 카이로스라는 음반사에서 내기로 했었습니다. ‘카이로스’는 현대음악만 전문적으로 하는 그런 회사로, 2004년에 출반하기로 계획을 하고 광고도 다 나가고 했는데, 갑자기 그 회사가 망해버리는 바람에 잠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그러다가 전화위복으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관심을 보여 거기서 발매되는 현대음악 시리즈인 20/21의 하나로 올해 2월 초에 발매가 되었습니다. 발매된 지 한 5일 후부터는 인터넷에 중고판도 나와 있습니다. (웃음) 이 음반에 실린 네 곡 중 두 번째 곡인 <기계적 환상곡>만 스튜디오 녹음이고, 나머지는 전부 연주회 실황 녹음입니다.

<기계적 환상곡 Fantaisie Méchanique> (1994)

두 번째 실린 <기계적 환상곡>은 제가 앙상블 앵테르콩템포랭과 처음 같이 작업한 곡입니다. 그 당시, 1992년에 이 앙상블은 매해 리딩 패널을 했는데요. 젊은 작곡가들을 뽑아서 위촉을 하고 자기네가 작품을 연주하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거기에 제가 뽑혀서 처음으로 이 앙상블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제가 지난 20년 동안 쓴 작품 중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작품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작품이 파리에서는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그게 너무나 큰 기회였지요. 그래서 이 기회를 통해 앞으로 파리에도 내가 발을 붙이겠다는 너무나 큰 욕심을 가지고 곡을 시작했어요. 다섯 명의 솔리스트를 위한 곡인데, 편성도 피아노, 트럼펫, 트롬본, 그리고 타악기 두 명이라는 굉장히 곡을 쓰기 어려운 편성으로 정해서. 곡을 일단 쓰긴 썼습니다. 그런데 이 곡을 쓰면서 가장 큰 실수를 한 것이, 이 다섯 악기들을 아주 동질성 있는 한 그룹으로 모으려는 욕심을 가지고 곡을 쓴 것이었습니다. 아주 다를 수밖에 없는 악기들을 억지로 그런 틀에다가 끼워 맞춰 가지고 곡을 쓴 것이지요. 초연은 아주 대실패였습니다. 왜냐하면, 연주자들도 (물론 굉장히 잘하는 연주자들이지만) 그냥 단순한 곡을 갖다 거의 초견으로 하다시피해서 연주하는 데 익숙해져 있고, 이렇게 곡이 너무 어렵고 연습을 많이 해야 되면 굉장히 짜증을 내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연주자들한테 굉장히 힘들었고, 지휘자 없이 하기로 했다가 곡이 너무 어려워서 지휘자도 하나 불러왔는데, 그 지휘자도 별로 그런 데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일단 곡에 문제가 많았고요. 초연하는 날 파리에 있는 모든 현대음악 관계자들이 퐁피두센터 연주장에 모여 기다리고 있는데, 완전히 대실패를 했습니다. 그 실패 후에 마음이 너무나 괴롭고 슬럼프에 많이 빠졌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위안을 받은 것은, 그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 뉴스에 캐나다 어디 섬 근처에 굉장히 공기가 맑고 아주 깨끗한 자연에 기름을 싣고 지나가는 큰 배가 사고가 나서 몇 백만 리터의 기름이 흘러나와 그 바다를 다 오염시킨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제 작품을 망친 것 때문에 굉장히 마음이 괴로우면서도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 선박회사 사장은 오늘 나보다도 더 잠을 못 자겠구나 (웃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순간 내 작품 하나가 실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별 것 아닌 일이 되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작품하나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누구한테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그 작품이 연주되는 동안은 괴롭겠지만. (웃음) 하여튼 그렇게 위로를 받았는데, 그래도 한 6개월 정도는 그것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처음에는 남들에게 탓도 돌리고 했지만, 결국은 그 잘못이 나의 무능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한 6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다음에도 계속 그것이 항상 마음 한 구석에 큰 문제점으로 남아있었는데, 초연 3년 후에 그 앙상블에서 다시 그 곡을 연주한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끔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똑같은 제목 하에 완전히 새 곡을 다시 썼습니다. 그래서 초연을 다시 했는데, 물론 이 곡에는 아직도 문제가 굉장히 많지만, 그래도 처음의 오리지널 버전보다는 많이 나은 형태이고, 한 10년쯤 지나서 다시 어떤 새로운 버전을 만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곡은 여러분의 궁금증을 돋우기 위해서 안 들려 드리겠습니다. (웃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는데요. 이 <기계적 환상곡>에서 제가 의도했던 것은, 굉장히 즉흥적인, 즉흥 재즈같은 그런 식의 분위기의 곡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즉흥적인 성격을 띤 음악이지만 악보나 구조상으로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획되어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흥적으로 들리는, 그런 어떤 상반된 모순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그런 식의 음악을 시도했었습니다.

<Xi> (1998)

음반에 세 번째로 실린 앙상블과 전자음향을 위한 <씨>라는 곡은, 제가 여태까지 만든 전자음악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곡입니다. ‘씨(Xi)’라는 말은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한국말로 ‘씨’, 그러니까 아주 작은 단위의 어떤 씨에서 굉장히 큰 것들이 생성될 수 있는 가장 최소단위의 ‘씨’를 의미합니다. 이 음악도 앙상블 앵테르콩템포랭의 작곡되었는데요. 스튜디오에서 일단 전자음악 부분을 만들면서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단은 피아노 소리를 샘플링 했어요. 피아노 소리를 가지고 음향 실험을 많이 하는 가운데 우연히 어떤 음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랜드 피아노 뚜껑을 열어놓고 페달을 밟은 상태에서 그 안에 있는 쇠로 된 대같은 것을 두꺼운 막대기로 탁 두드리고 그 잔향을 녹음했습니다. 어택은 잘라 버리고 그 소리를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하니까, 피아노 84현이 울리는 이 소리가 마치 숨소리처럼 들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서 착상을 얻어서 곡의 제목을 ‘씨’라고 붙이고, 그런 소음 숨소리에서 시작되어 어떤 큰 구조로 발전되고 마지막에는 다시 그 숨소리 혹은 먼지로 돌아가는, 어떤 유기적이고 생물학적인 그런 구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전체구조는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데, 여러 가지 섹션들 가운데 맨 마지막 부분은 소리가 생성되어 발전되고 다시없어지는 그런 전체적인 큰 구조가 축약된 짤막한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그 부분을 잠깐 들어보시겠습니다.

♬ <씨> 맨 마지막 부분 감상

<이중 협주곡> (2002)

마지막으로 네 번째 수록되어있는 곡은 <이중 협주곡>입니다. 독주는 프리페어드 피아노, 피아노 중간에 두 옥타브 정도를 조그만 쇠들(책장 선반을 받치기 위해 구멍에다 끼우는 조그만 쇠들)을 끼워가지고 소리를 변형시킨 피아노와 타악기입니다. 거기에 앙상블은 열일곱 명의 주자들로 이루어집니다. 이 음반에 있는 곡들 중에서 가장 최신 곡인데요. 역시 앙상블 앵테르콩템포랭의 위촉작으로 2002년에 작곡되어서 2003년 초에 역시 파리의 라디오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지난 번 한국에 와서 강연할 때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비유럽적인 전통음악에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요. 물론 한국음악에도 관심이 많고요. 특히 몇 년 전에 제가 집중적으로 공부했던 음악이 인도네시아의 가멜란 음악입니다. 우연히 발리에 바캉스를 가서 그 음악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전에도 리게티 선생님께서 발리의 가멜란 음악에 대해 굉장히 칭찬을 많이 하셨어요. 복합적이면서도 단순하고 그러면서 음악 표현의 흐름이 자유자재로운 그런 음악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제가 발리에 가서 직접 경험해 본 것도 그랬습니다. 그 음악에 너무너무 매료되어서 그 악기들을 배우고 채보도 좀 하고, 두세 번 정도 그렇게 발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발리의 가멜란 음악이 제 음악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중 협주곡> 전에도 발리 가멜란 음악에서 받은 영향을 제 작품에 많이 수용하곤 했는데, <피아노 협주곡>의 경우에는 가멜란 음악의 리듬구조 같은 것을 많이 가져다 썼고요,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음색적인 차원에서 가멜란 음악을 많이 수용했습니다. <이중 협주곡>에서는 가멜란 음악이 총체적으로 나오는데요. 물론 이 곡이 가멜란 음악은 절대로 아니고 제 곡이지만, 가멜란 음악에서 받은 영향들이 제 식으로 소화되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다른 협주곡들처럼 독주자라고 해서 특별히 더 큰 역할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고, 독주자와 앙상블이 전체로 모여가지고 하나의 큰 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선 첫 부분의 첫 단락과 둘째 단락을 들으시겠는데요, 첫 단락에서는 독주자와 앙상블이 하나의 동질적인 그룹으로 하나의 커다란 음원을 이루고 있고, 둘째 단락부터는 독주자가 앙상블에게 어떤 어택을 줍니다. 한 음을 주면 그 음을 각 주자가 받아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스토리를 얘기합니다.

♬ <이중 협주곡> 첫 부분의 첫 단락과 둘째 단락 감상.

여러분들 귀에는 이 곡이 굉장히 복잡하게 들릴 거예요. 그리고 여기 음향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기 때문에 제가 들어도 명확하게 집어서 듣기가 힘든데, 음의 구조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반음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요. 물론 열두 음을 다 사용하지만, 쇤베르크가 했던 것과 같이 12음 기법적인 그런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맨 마지막 단락에서는 전체 음구조가 아주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열 두음을 갖다가 두 개의 온음계로 나눠서, 한 온음계가 연주되고 나면 완전 5도를 통해 다음 온음계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열두 음이 결국 다 사용되지만 반음계적인, 직접적인 반음계는 나오지 않습니다. 코다에서는 현악기가 글리산도 같은 걸 많이 하는데, 피아노는 할 수 없는 그런 요소지요. 피아노는 항상 정해진 피치 밖에 연주하지 못하지만, 현악기는 거기서부터 항상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악기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여러 가지 현악기의 주법들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마지막 코다에서는 현악기군 전체가 글리산도로 도망가고, 독주자인 타악기와 피아노가 화음을 통해서 그것을 잡으려고 노력하는데, 결국은 잡지 못하고 놓지는 그런 식의 코다를 구상했습니다. 그러면 <이중 협주곡>의 마지막 부분을 들어보시겠습니다.

♬ <이중 협주곡>의 코다 부분 감상

제가 말씀드렸던 그 음의 구조를 작곡하시는 분들은 간파하실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태까지 이 네 개의 앙상블 곡들을 들으시고 저게 음악인가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좀 쉬운 음악을 준비했습니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업

제가 지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를 가지고 오페라를 계획하고 있는데, 3분의 1 정도 작곡이 끝난 상태입니다. 어떤 분들은 ‘괴상한 나라의 앨리스’ 라고도 하시는데요, 그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계시죠.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 너무너무 많이 퍼져있고 많은 사람들이 알면서도 굉장히 많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단순히 동화라고만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동화 이상의 것이거든요. 어린이들이 읽으면 동화고, 수학자가 읽으면 수학 이야기고, 물리학자가 읽으면 물리학 이야기고,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굉장히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보통 동화와 같이 무슨 선악을 강조한다든가 아니면 도덕성이 강조된다든가 교훈적인 내용이 나온다든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음악적으로 번역을 하면 굉장히 재미가 없거든요.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기승전결도 없습니다. 그냥 앨리스가 꿈꾸는 여러 상황들이 기상천외하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알고 있는 그런 상식과 논리가 완전히 뒤집어진 넌센스적인 상황으로 계속 연결되면서, 말의 유희도 계속 연속되는 그런 상황의 나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이야기를 보면 거기서 벌어지는 일과 앨리스가 어떤 축을 이루는데, 그러니까 앨리스는 읽는 사람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죠. 앨리스마저도 그 상황에 들어가 있게 되면 앨리스 자체가 그 모든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얘기가 될 수 없죠. 앨리스는 그렇게 이상한 상황들이 벌어지는 것과는 조금 동떨어진 차원에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경이롭게 생각하고 놀라워합니다. 그것이 읽는 사람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앨리스 이야기를 쓴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이라는 이름은 사실 가명이고, 원래 본명은 찰스 루드비히 독슨(Charles Lutwidge Dodgson)으로 옥스포드 대학의 수학교수였어요. 앨리스 자매와는 아주 특별한 친분이 있어서 세 자매를 데리고 템즈 강에서 한번 보트를 타고 가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를 해 줬는데, 앨리스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이것을 책으로 써주면 너무너무 기쁘겠다고 하여 책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리게티 선생님께서 앨리스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셨고, 이걸로 오페라를 쓰고 싶다고 계획도 하고 그랬는데, 저는 이 얘기를 어른이 되어서 읽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읽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읽으면서 너무나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것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많은 꿈들을 꾸면서 살아왔는데, 그 꿈들 중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꿈들,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꿈들이 있었어요. 그런 식의 상황이 앨리스 이야기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앨리스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 꿈 얘기를 읽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더욱더 거기에 매료되어서 오페라를 쓰기로 했습니다. 이 앨리스 이야기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학자들의 많은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아르노 슈미트같은 작가는 앨리스 이야기를 현대문학의 아버지, 현대음악의 시초라고 했고요. 굉장히 많은 심리학자, 물리학자, 사회학자, 혹은 수학자들이 이 앨리스를 연구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연구서에 앨리스에서 나오는 상황들을 굉장히 많이 인용하곤 했습니다. 유명한 과학자인 더글러스 호프슈태더(Douglas R. Hofstadter)는 그의 저서『괴델, 에셔, 바흐』 초판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정신세계에 붙임’이라는 부제를 달아 출판했습니다. 미국의 수학자인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는 인생의 50년 이상을 앨리스 연구에만 바쳤고, 자신의 코멘트를 단 ⟪주석달린 앨리스 Annotated Alice⟫를 1960년 출판했고, 1990년에는 그보다 더 많은 코멘트를 단 ⟪좀 더 많은 주석 달린 앨리스⟫를 출판했으며, 몇 년 전인 2000년에는 ⟪앨리스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앨리스 완결판을 출판했는데, 이 마틴 가드너의 버전이 제 오페라의 기초입니다. 이 버전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이 오페라를 쓰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오페라로 쓰기로 하고 책을 읽으면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는 와중에 힘들었던 것은, 이 이야기에는 넌센스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이것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현대에는, 예를 들어 제가 12음 기법을 쓰거나 무엇을 부스러뜨려도 그것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넌센스를 표현할까. 그런데 결국에 가서는 넌센스와 센스, 논리와 비논리는 동전의 양면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고, 넌센스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센스가 필요하다는 식의 생각을 나름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이상하다고 해서 이상한 짓을 하려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이상한 것을 안 함으로서 이상해지려고 생각했습니다.

오페라를 계획하고 곡을 쓰던 중, 작년에 이 오페라를 초연할 일본 지휘자 켄트 나가노가 페스티발에 초청받아 가는데 앨리스 이야기를 스케치 식으로 해서 미리 좀 만들지 않겠느냐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 곡을 쓰면서 작곡가로서 굉장히 고민이 많이 되었던 점이 아까 들으셨던 그런 식의 앙상블, 그런 식의 언어로는 앨리스 이야기를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지금까지 써 온 내 음악 스타일을 지키기 위해 그런 예쁜 이야기를 거기에 끼워 맞출 수는 없고, 뭔가 이 이야기를 100%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어법을 만들어내야 된다고 생각해서 정말 힘들었는데, 결국 현대 오페라와 뮤지컬 그 중간의 어떤 선을 포착해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앨리스 이야기에서 다섯 개를 뽑아 메조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썼습니다.

I. Alice-Acrostic – ALI CEP LEA SAN CEL IDD ELL

A boat beneath a sunny sky,
Lingering onward dreamily
In an evening of July —
Children three that nestle near,
Eager eye and willing ear,
Pleased a simple tale to hear ―
Long had paled that sunny sky:
Echoes fade and memories die.
Autumn frosts have slain July.
Still she haunts me, phantomwise,
Alice moving under skies
Never seen by waking eyes.
Children yet, the tale to hear,
Eager eye and willing ear,
Lovingly shall nestle near.
In a Wonderland they lie,
Dreaming as the days go by,
Dreaming as the summers die:
Ever drifting down the stream ―
Lingering in the golden gleam ―
Life, what is it but a dream?
(Text written by Lewis Carroll)

첫 곡 “Alice-Acrostic”는, 루이스 캐롤이 이 앨리스 이야기가 나오던 그 날, 템즈 강에서 리들 자매(둘째가 앨리스)와 보트를 타고 소풍가는 정경을 시로 썼는데, 그것에 음악을 붙인 것입니다. ‘Akrostichon’이라는 것은 (제 곡 <말의 유희>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문장의 첫 자를 합치면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그런 시를 말합니다. 이 곡 텍스트의 각 줄 첫 자를 합치면 앨리스의 풀 네임, ‘앨리스 프레쟝스 리들(Alice Pleasance Liddell)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음악은 의도적으로 그 당시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에 유행하던 동요라든가 민속음악(folkmusic)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모방해서 작곡했습니다. 그러면 이 곡을 들어보시겠는데요, 작년에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오하이오 페스티벌(로스앤젤레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 것)에서 켄트 나가노의 지휘로 초연된 것으로, 메조 소프라노는 마가렛 톰슨입니다.

♬ “Alice-Acrostic” 감상

II. Who in the world am I? (나는 누구인가?)

둘째 곡은 제2장 ‘눈물의 웅덩이’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서 굴로 들어간 다음에 앨리스의 모험이 시작되는데요. 케이크를 먹고 무엇을 마시면서 커지든가 작아지든가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것을 마틴 가드너는 어떤 식으로 해석했냐면, 루이스 캐롤이 사실은 앨리스를 사랑했는데, 앨리스가 굉장히 어린 아이이고 그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이지만, 사랑했기 때문에 앨리스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연적인 법칙에 의해 언젠가 앨리스는 큰 성인이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어떤 두려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여러 가지 굉장히 복합적인 루이스 캐롤의 심리 상태를 이런 대목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앨리스가 토끼굴로 들어간 다음에 너무나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자꾸만 늘어나고 줄어들면서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상하게 목만 길어지는 아주 괴상한 것이 되기도 하니까, ‘도대체 내가 누구일까?’ 그렇게 물어보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말 번역을 보면,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에이다는 분명히 아냐. 걔 머리는 아주 긴 곱슬 인데 내 머리는 그렇지 않거든. 메이블도 아니야. 나는 아는 게 아주 많은데, 걔는 아주 무식해. 게다가 걔는 걔고 나는 나야. 이 수수께끼는 정말 어렵다. 내가 알고 있던 걸 그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 자, 4 곱하기 5는 12, 4 곱하기 6은 13, 4 곱하기 7은 ……, 아, 이런! 이렇게 하다간 언제 20까지 갈지 모르겠군! 하지만 구구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지리나 해보자. 파리의 수도는 런던, 런던의 수도는 로마, 로마는 …… 아 아냐, 이건 전부 틀렸어! 난 메이블로 변한 게 틀림없어. 그럼 ‘부지런한 꼬마……’나 외어 볼까?” 그러면서 앨리스는 당시 굉장히 유행했던 시를 읊는데, 그게 단어와 모든 게 바뀌어 나옵니다. “꼬마 악어 한 마리가 / 빛나는 꼬리를 손질하고, / 나일강의 물로 / 황금 비늘을 한 장 한 장 씻어요! / 꼬마 악어는 환하게 웃으며, / 앞발을 공손히 내밀고, / 부드럽게 웃음짓는 입 속으로 / 작은 물고기들을 맞아들여요” 그런데 앨리스는 이것을 얘기하면서 “이것도 분명히 틀렸을거야. 난 정말 메이블이 됐나 봐. 그럼 오두막집에서 살아야 하고, 장난감도 없고, 게다가 아! 죽어라하고 공부만 해야 하잖아! 아냐,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내가 정말 메이블이라면 나는 그냥 여기서 살 거야! 사람들이 이 속에다 고개를 디밀고 ‘얘야, 어서 올라와!’ 해도 그냥 올려보면서 ‘내가 누군데요? 그걸 먼저 말해주세요. 그러기 전에는 올라가지 않겠어요.”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는 부분의 가사를 떼어다가 둘째 곡을 작곡했습니다. 들어보시죠.

♬ “나는 누구일까?” 감상

III. The Tale-Tail of the Mouse (쥐의 이야기)

셋째 곡은 “쥐의 이야기”입니다. 이 쥐는 언제 등장하냐하면, 앨리스가 커졌을 때 절망해서 막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데, 나중에 그 눈물이 모아져 강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앨리스가 다시 줄어들어서 그 강, 자기 눈물의 강에서 헤엄을 치게 되는데, 그때 저쪽에서 쥐가 한 마리 나옵니다. 앨리스가 쥐하고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 쥐가 C와 D를 아주 증오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C와 D와 뭘까요? Cat와 Dog이죠. 그래서 음악을 쓸 때도 C음과 D음을 강조해서 썼습니다. 한국말 버전은 ‘고’와 ‘강’, 그러니까 고양이와 강아지를 싫어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싫어하는지 앨리스가 묻습니다. 나중에 얘기해주겠다고 하고 눈물의 강을 헤엄쳐서 나가는데, 거기에 각종 동물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동물들과 놀다가 앨리스가 “네가 네 얘기를 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쥐가 하는 말이 “나에게는 아주 길고 슬픈 얘기다”고 그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시는 마치 쥐의 꼬리와 같은 형태로 되어있는데요. 쥐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앨리스에 의해 종합되어 상상되어진 시의 형태는 이런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이 쥐가 가운데서 자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슈프레히게장(Sprechgesang), 그러니까 말하는 식의 어떤 소리만 사용해서 대사를 읊게 되는데요. 각 악기들이 연주하는 멜로디의 형태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막 움직이다가 꼬불꼬불하게 밑으로 내려오는 그런 식의 음형들을 많이 쓴 그런 식의 음악입니다. 가사의 내용은, “분노의 여신이 / 집안에서 쥐와 / 맞닥뜨렸지. / 분노의 여신은 / 쥐에게 / 이렇게 말했어. / 너, 나랑 같이 / 재판소에 가자. / 내가 너를 / 고소하겠다. / 어서, 거부해 / 봤자 소용없다. / 우린 널 꼭 / 재판에 / 붙이고 / 말거니까. / 난 오늘 / 아침엔 / 그것밖에 / 할 일이 없단 / 말씀이야.” / 쥐는 그 / 망나니에게 / 말했지. / “여신님, / 배심원도 / 판사도 없는 / 재판은 공연한 / 헛수고가 / 아닐까요?” / 늙고 교활한 / 분노의 여신이 / 말했지. / “내가 바로 / 배심원이고 / 판사다. 내가 / 이 사건을 맡아 / 너를 사형에 / 처할 / 것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내용의 노래입니다. 들어보시겠습니다.

♬ “쥐의 이야기” 감상

IV. Speak roughly to your little boy (아이에게는 거칠게 말해라)

다음 곡은 제6장 “돼지와 후춧가루”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앨리스가 모험을 하면서 가다가 어떤 숲 속에서 집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는 하인이 지키고 있고 그 하인과 잠깐의 대화를 한 다음에 문이 열려있어 집으로 들어가는데, 거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자마자 부엌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못생긴 공작부인이, 위의 그림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공작부인 집의 부엌입니다. 공작부인은 아기를 하나 안고 있습니다. 세발 의자에 앉아서요. 그리고 아기는 끊임없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옆에는 요리사가 큰 솥에 스프를 끓이고 있는데 스프는 물보다도 후추가 더 많이 들어가 있는 스프입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저 고양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체셔 고양이’라고 앉아서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습니다. 저런 상황에서 앨리스가 부엌에 들어가 이런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공작부인과 앨리스가 대화를 하는 동안 아기는 계속 울어대고 공기는 후춧가루로 가득차서 계속 재채기를 해야만 하고, 또 요리사는 모든 주방기구들 냄비, 포크, 접시 등을 공작부인한테 계속 던집니다. 이 곡에서는 주방기구를 던지는 부분 때문에 타악기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것을 현실화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무대에서 와인 잔을 깨뜨리고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게 굉장히 큰 쓰레기통을 두 개를 마련하여, 거기에다 타악기 주자들이 악보에 표시된 그 시간에 냄비도 집어넣고, 포크도 던지고, 와인 잔도 던져 놓고, 그렇게 하여 타악기 효과를 냅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들이 글리산도같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아기의 우는 비명 소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허설 때에는 그런 타악기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와인 잔을 깨뜨려서 효과를 내려면 적어도 한 열여덟 개의 와인 잔이 필요한데 리허설 때마다 열여덟 개의 와인 잔을 깨뜨릴 수는 없기 때문에, 본 연주에서만 와인 잔을 썼습니다. 다음에 제대로 된 오페라를 할 때는 그것을 샘플러로 대체할 예정입니다. 경제적이기 때문에요. 이 곡은 이 못생긴 공작부인이 아기를 달래기 위해서 부르는 일종의 자장가인데, 그 내용은 그 당시 굉장히 유명했던 시입니다. 아이에게는 부드럽게 얘기하고 등등… 좋은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켜한다는 그런 교훈적인 시가 있었는데, 루이스 캐롤이 그것을 패로디하여 변형시켰습니다. “아이에게는 거칠게 말하고 / 재채기를 하면 두들겨 패라. / 아이는 화나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하지. / 그것이 곯려주는 방법인 줄 알고서.” / 그리고 후렴은 “와우! 와우! 와우!” 2절은, “나는 우리 애한테 거칠게 말하고, / 재채기를 하면 두들겨 패지. / 아기는 내킬 때면 언제나 / 후춧가루를 즐길 수 있으니까! / 와우! 와우! 와우!” 그런데 이 곡을 쓰면서 저는 텍스트를 조금 더 변형시켰습니다. 제 버전에는 “재채기를 하면 두들겨 패라”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흔들고 꼬집어라”까지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초연이 끝난 후 사람들이 와서 같이 갔던 제 아들을 보고 ‘얘가 당신이 그렇게 취급하는 걔냐?’ 고 물었습니다. (웃음) 자 그럼, 못생긴 공작부인이 부르는 자장가를 들어보시겠습니다.

♬ “아이에게는 거칠게 말해라” 감상

V. Twinkle, twinkle, little star (반짝 반짝 작은 별)

마지막 곡은 제7장 “미친 다과회 티 파티”에서 나온 장면입니다. 앨리스가 미친 공작부인을 만나고서 숲으로 나오는데 공작부인 집에 있던 체셔 고양이가 숲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습니다. 거기서 대화를 하다가 고양이가 하는 말이, “저 방향으로 가면 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미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하니까, 앨리스가 “나는 미친 사람들에게 가고 싶지 않아. 나는 안 미쳤으니까.” 그러자 고양이가 하는 말이, “너도 미쳤고 나도 미쳤다. 네가 미치지 않았다면 여기 올 리가 없다.” 그 다음에 앨리스는 고양이가 얘기한 그 집에 찾아가, 다과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티를 마시는 그런 자리에 참석하게 되는데요. 그림에서 보이듯이 아주 굉장히 큰 탁자에 티 세트가 많이 준비되어 있고, 모자장수와 3월의 토끼가 티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도어마우스가 잠을 자고 있고, 잠자는 도어마우스를 이 두 사람이 양쪽에서 쿠션으로 이용해서 걸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앨리스는 왜 이렇게 티 세트가 많이 준비되어 있는가, 하나면 되지 왜 그런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미친 모자장수가 한 번 여왕에게 초대를 받아가 여왕을 위해 노래를 했는데, 그게 우리가 잘 아는 “반짝 반짝 작은 별 Twinkle, twinkle, little star” 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어떤 식으로 했냐 하면, “반짝, 반짝, 박쥐야! 너는 지금 뭘 하니! 하늘 나는 쟁반처럼 하늘 위를 날아가네. 반짝, 반짝……” 이렇게 노래를 하는데, 1절도 끝나기 전에 여왕이, “저자는 시간을 살해하고 있군. 당장 저 자의 목을 베어라.” 이렇게 여왕의 분노를 샀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 미친 모자장수의 현실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항상 6시입니다. 이 미친 모자장수는 여왕의 저주를 받아서 시간의 노예가 됐다라고 할 수 있죠. 6시라는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티타임에도 시간이 지나가야지 티를 마시고 잔을 씻고 하는데 시간이 항상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잔을 씻을 시간이 없어서 한 잔을 마시고 그것을 다 마시면 옆자리로 옮겨서 새 잔으로 또 티를 마십니다. 이러면서 뱅글뱅글 탁자를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가 잘 아는 ‘반짝 반짝 작은 별’의 네 마디만 따서 그것의 패러디를 만들었습니다. 워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에도 원래 가사가 패러디되어 있는데요. 저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패러디를 해서 가사를 늘렸습니다. 그러니까 ‘twinkle’ 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소리의 단어들 twinkle, sprinkle, wrinkle 등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요. 각 절마다 여러 가지 패러디를 담고 있습니다. 돼지도 등장하고, 에드 라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반짝거리는 에드, 나는 네가 어떤지 참 놀라고 있다” 이런 식의 내용도 있고요. “반짝 거리는 빌, 나는 네가 얼마나 뚱뚱한지 경탄하고 있다” 이런 식의 내용도 들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제가 다 만든 것입니다. 에드와 빌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인물이기도 하지만, 에드는 이 오페라가 연주될 오페라 좌의 극장장 이름이고, 빌은 이 작품을 연출할 연출 감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사를 늘려서 우리가 잘 아는 ‘반짝반짝 작은 별’의 멜로디 네 마디만 따서 만든 것이 마지막 곡입니다.

♬ “반짝 반짝 작은 별” 감상

이렇게 다섯 곡이 제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페라 프로젝트의 스케치로 미리 작곡해서 연주한 곡입니다. 제대로 된 오페라는 2007년 뮌헨 주립 오페라단에서 6월 말에 초연할 예정이고, 그 후 2010년에는 앨리스의 두 번째 이야기 ⟪거울 뒤의 앨리스⟫ 오페라가 계획 중입니다.

오늘 이렇게 장시간 주의 깊게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3』 (2005), 5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