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했던 20세기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면서, 치열하게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작곡가들도 이제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간다. 죄르지 리게티. ‘현대음악’이라는 다소 낯설고 부담스러운 존재를 흥미롭고 들을 만한 영역으로 여기게 만든 인물. 수많은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음악에 도전하는 즐거움을 선사한 작곡가. 대가연하는 아우라가 전혀 없이 반권위적인 태도를 지녔지만 작품에 관한 한 가차 없이 비판하는 철저한 장인정신의 소유자. 자신이 도달한 지점에 머무르지 않고 횡단과 접속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창작세계를 변모시켜나간 예술가. 그는 분명 ‘현대음악’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20세기 예술사의 흐름에 하나의 커다란 족적을 남긴 거장이었다.
1923년 5월 28일 당시 루마니아 땅이던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유대계 헝가리인으로 태어난 리게티는, 나치즘과 2차 대전을 겪으며 생과 사의 문턱에서 살아남았고, 부다페스트 음악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공산정권 하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서랍용 작품’을 쓰며 작곡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1956년 헝가리 민주화운동이 소련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된 후 서방으로 탈출하여 서유럽 아방가르드 진영에 뒤늦게 동승하지만, 학창시절 바르토크를 우상으로 여겼던 동유럽 출신의 이 작곡가는 50년대 풍미하던 음렬주의와 우연성의 문제의식에 비판적이었다. 1961년 출세작 <아트모스페르>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음악 세계를 펼쳐가기 시작한다. ‘대기’ 혹은 ‘분위기’라는 뜻의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선율도, 리듬도, 화성도 없다. 오직 거대한 음향덩어리가 무지개빛으로 분광하며 흘러갈 뿐이다. 이전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이 사운드는 초연 당시 앙코르로 한 번 더 연주될 정도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스탠리 큐브릭의 공상과학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리게티 사운드’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그의 음악 작법은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관용구가 되지만, 이 시기 스타일은 리게티 음악의 한 봉우리에 불과하다. 70년대 작곡된 오페라 <그랑 마카브르>(거대한 죽음)처럼 당시 경도되었던 찰스 아이브스와 팝 아트 및 재즈의 흔적을 강하게 보여주는 곡도 있다. 또 몇 년간의 침잠과 치열한 고민 속에서 등장한 80년대 <피아노 연습곡>과 <피아노 협주곡> 등은 아프리카 폴리포니 음악에서 콘론 낸캐로우의 자동 피아노 음악, 카오스이론과 프랙탈기하학의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까지 다양한 영역과 접속하여 생성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의 세계였다.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예순을 훌쩍 넘긴 후였으나, 그 후로도 리게티는 자신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또 다른 세계를 탐색해나간다. 90년대 <바이올린 협주곡>, <비올라 소나타> 등에 이어 2000/01년 78세의 나이에 발표된 신작들, 특히 성악과 타악 앙상블을 위한 <피리, 북, 깽갱이로>는 말년의 또 다른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리게티의 작품 세계는 하나의 얼굴로 대표될 수가 없다. 다작가가 아니기에 작품 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고유의 개성을 지니고 있고, 각 시기마다 계속해서 변모를 거듭해갔기 때문이다. 40년대 학창 시절 쓴 민속춤곡이나 민요편곡 등에서 2000년 작곡된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많은 연주자들에게 아주 선호되는 현대음악 레퍼토리에 속한다. <무지카 리체르카타>와 <피아노 연습곡>, <첼로 소나타>와 <비올라 소나타> 같은 독주곡만이 아니라, 관악오중주곡 <여섯 개의 바가텔>, <호른트리오>, <현악사중주곡> 같은 실내악곡, 무반주 아카펠라 합창곡과 다양한 편성의 성악 앙상블곡을 비롯하여,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 호른을 위한 독주 협주곡들과 <실내협주곡>, <이중협주곡>, 그리고 <루마니아 협주곡>, <론타노>, <샌프란시스코 폴리포니> 등의 관현악곡과 오페라까지, 작곡 시기와 장르를 막론하고 전 작품이 최근 수년간 놀라울 정도로 골고루 전 세계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리게티 음악은 20세기 후반 현대음악의 흐름을 아주 잘 따르는 듯 보인다. 서방으로 온 이후 60년대에는 음렬 음악을 비판하며 등장한 음향 작곡의 선두주자로, 70년대에는 미니멀리즘과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로, 80년대에는 새로운 복잡성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간주되었고, 90년대 이후에는 평균율이나 조성이 아닌 새로운 화성의 문제와 함께 세계화 시대 월드 뮤직에 대한 관심도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리게티가 특별히 새로운 흐름을 잘 포착했다거나 시대의 유행을 잘 따랐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리게티는 그러한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아카데미즘이나 상업주의의 길이 아닌 자신이 생각한 작곡가의 길을 차분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걸어갔을 따름이다. 그는 세상과 고립되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곡가가 아니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작곡가이며, 거대한 이념이나 체계를 구축하는 것과 애초에 거리가 먼 지극히 상식적인 통념을 지닌 예술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걸어간 그 길이 시대의 흐름과 조응했던 것이다.
리게티의 음악은 구호와 이념이 난무하던 현대음악 속에서 음악적 감수성의 부활을 조용하지만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21세기 멀티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화려한 시대에 현대음악이 나아갈 수 있는 조그만 오솔길을 만들어낸 작곡가. 좁지만 그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찾아오고, 그 길을 따라 가다 그들 스스로 또 다른 길을 찾게 만드는 예술가.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리게티라는 작곡가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리게티는 젊은 작곡가들에게, 지난한 작곡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길을 잃지 않도록 멀리서 빛나고 있는 ‘북극성’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후 스스로에게 되물어본다. 과연 죽는 날까지 나는 내가 도달한 것에 머무르거나 안주하지 않고 내면의 비판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며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객석 』 2006년 7월호, 5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