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내한한 안네 소피 무터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현대음악을 초연할 때의 느낌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작품에 첫 숨을 불어넣는, 생명을 주는 순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기분이라고. 작품과 작곡가에게 아주 개인적으로 친근한 감정을 갖게 된다고. 분명 연주자들에게 ‘초연’은, 혹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작품에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은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도전임에 틀림없다.
작곡가들에게도 훌륭한 연주자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미국 망명 시절 생활고와 건강 악화로 고생하던 바르토크는 그를 돕고자 하는 많은 지인들로부터 작품을 위촉받았다. 하지만 건강 악화로 작품을 완성할 수 없을 것 같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는데, 그것을 배려한 예후디 메뉴힌이 부담 없이 쓸 수 있도록 무반주 소나타를 부탁했다. 소박한 작품 하나를 기대했던 메뉴힌은 예상 밖의 엄청난 걸작의 탄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그건 어쩌면 메뉴힌의 연주가 촉발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연히 바르토크의 음악을 알게 된 메뉴힌이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연주하기 위해 작곡가를 찾아갔을 때, 메뉴힌의 연주를 들은 바르토크가 “살아생전에 이 소나타가 이렇게 연주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같은 훌륭한 러시아 연주자들이 아니었다면 20세기 피아노 문헌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작곡가에게 연주자는 단지 자신의 작품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매개자가 아니라, 창작의 원천이 되는 뮤즈, 자신의 음악을 가장 먼저 이해하는 청중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주자와의 음악적 교류는 창작 활동의 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곡가가 연주자이기도 한 시대가 아닌 한 더더욱 그렇다. 작곡, 연주, 이론의 영역이 각자 자신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한 창조적 예술이 생겨나기는 어렵다. 최근 많은 연주자들이 전통적인 클래식 레퍼토리가 아닌 새로운 작품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국내에서도 현대음악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앙상블이 늘어나고, 독주회에서 한국 작곡가들의 신작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제 연주자들이 작품을 찾아가며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만들어가는 시대가 온 것이다.
Studio2021의 ‘Performer’s Studio’는 이러한 연주자들의 다양한 욕구와 문제의식을 펼쳐내는 장이라고 여겨진다. 작곡가가 만든 ‘작품’은 세상에 나온 순간 이미 각자의 운명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한 번의 연주로 잊혀 지는가 하면, 작곡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른 연주자에 의해 세상에 나와 작곡가와 대면하기도 하니 말이다. 어쩌면 작품은 작곡가의 품 안에 있을 때보다 연주자에 의해 재탄생된 ‘연주자의 작품’일 때 더욱 생명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현대음악 교육은 작곡 전공보다는 차라리 연주 전공 학생들에게 더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의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작품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은 단지 현대 음악에 대한 소개라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이들이 이후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교육 현장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연주 전공 학생들이 현대음악 혹은 한국 창작음악을 접하는 계기는 무척 제한적이지만, 일단 접했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흡수하는 과정은 놀랄 만큼 빠르다. 물론 교과서적인 이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와 맞닥뜨리게 했을 때의 얘기다. 이들 ‘연주자’의 ‘작품’이 풍성해질 때, 비록 줄어드는 클래식 음악에 극히 일부를 차지할지언정 현대음악의 자리는 소수들의 유쾌한 축제가 되지 않을까.
연주자들이 고전적인 클래식 레퍼토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창작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면, 21세기의 작곡가들은 어떤 도전에 직면해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작곡가’는 ‘작곡’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팔레스트리나가 미사를 썼던 시대의 ‘작곡’과 베토벤이 교향곡을 썼던 시대의 ‘작곡’이 같지 않음은, 슈베르트가 가곡을 썼을 때의 ‘작곡’과 오늘날의 노래 ‘작곡’이 동일하지 않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단지 음악 스타일만 달라진 게 아니라, 곡을 쓴다는 것의 의미와 기능, 그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방식 자체가 변했다. 네이버 검색창에 ‘작곡가’를 치면 영화음악 작곡가, 대중가요 작곡가, 벨소리 작곡가, 뮤지컬 작곡가 등등 온갖 작곡가들이 화면을 채운다. 물론 바흐, 베토벤, 윤이상 등의 이름도 있긴 하다. 하지만 오늘날 ‘작곡가’라는 표상은 어떤 음악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클래식 음악’ 계에서 통용되는 ‘작곡가’ 혹은 ‘작품’에 대한 이미지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후원자로부터 독립된 예술적 주체로서의 ‘작곡가’라는 존재는 베토벤을 기점으로 생겨난 것이고,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상업적 이유가 아닌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작품’이라는 표상도 콘서트홀에서의 공공음악회 및 그 청중의 탄생과 함께 태동된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처럼 귀족들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멘델스존처럼 집이 부유하거나 로시니처럼 대단한 히트작을 내지 않고서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쓰고 작곡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작곡가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글을 쓰고 지휘를 해야 했던 것 아니던가. 19세기 작곡가들은 악보 출판(그것도 주로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피아노곡과 노래들)이나 연주 혹은 레슨을 하며 자신의 음악 활동을 영위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점차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은 넓어지고 그에 따라 광범위한 대중이 향유하는 음악과 일군의 진지한 음악 청중이 분화되기 시작한다. 쇤베르크로 대표되는 고립된 작곡가 상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지배하던 빈이라는 특수한 문화적 조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작곡가가 청중과의 소통보다는 예술적 ‘진리’의 상아탑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대학에 자리를 잡지 않는 한 ‘작곡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질문하지는 말자.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그 질문 자체가 현재 별로 유의미하지도 않다. 한 가지 사실만 짚고 넘어가면 될 듯하다. 급변해온 사회와 삶의 양상에 비해, 우리가 갖고 있는 ‘작곡가’와 ‘작품’이라는 표상은 19세기적인 관념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21세기는 그 어떤 시대보다 엄청난 변화를 겪은 20세기를 지나왔다. 베토벤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조건이, 그 삶을 둘러싼 소리의 양상이 달라졌다. 그래서 브렛 딘이라는 작곡가의 2000년 작 <전원 교향곡>은 베토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데 달라진 건 단지 소리의 양상만이 아니다. 음악을 창작하는 방식, 유통하는 방식, 향유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19세기 형성된 콘서트 형태가 여전히 음악 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축음기 발명 이후 급성장한 음반 산업은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무력화시키며 콘서트 중심의 음악문화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에 의한 전지구화 역시 음악의 생산과 유통, 소비 형태를 끊임없이 변모시켜나가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19세기적인 ‘작곡가’와 ‘작품’ 관념이 확고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정도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만 그러하지, 제도 밖에서 벌어지는 음악적 현실은 놀랄 만큼 다채롭고 역동적이다. 이른바 ‘작곡가’들이 모여 있는 협회나 대학을 벗어나는 순간, 도처에서 작곡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음악적 계기들이 포착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곡가’는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자신의 작업이 요구되는 곳에서 쓰이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든 존재다. 그 쓰임새는 연주회장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고, 영화관일 수도 있고 인터넷 게임방일수도 있다. 사회가 다변화하는 만큼 ‘작곡’도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건 단지 대중적인 양식의, 실용적인 음악을 쓰자는 말이 아니다. 소리를 통해 사유하고 표현하는 작곡가로서, ‘작곡’을 하며 살 수 있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계기를 포착하자는 것이고, 그 속에서 창작자로서의 비전과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가자는 의미다. Studio2021의 ‘Composer’s Studio’는 그러한 길을 모색해나가는 장이었으면 한다. 좌충우돌 부대끼며 고민하는 작곡가들의 다양한 ‘작업’이 기획되고 논의되면서 창작의 다양한 지평이 펼쳐질 수 있는 생성의 공간 말이다.
21세기에 작곡가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음악 형태만큼 다양한 모습일지 모른다. 그에 따라 ‘작곡’의 외연이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한다면, 그 과정에서 ‘작품’이라는 말의 함의도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래의 사회는 이전처럼 위대한 한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전문성을 지닌 여러 집단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만들어져갈 것이라고들 한다. 프로젝트형 예술가가 요구된다는 시대에 작곡가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작곡가의 ‘작업’이 완결된 정신적 산물로서의 ‘음악작품’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접속하며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생산물과 향유 방식을 만들어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곡가들에게 그런 미래의 비전까지 떠안기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하지만 어쩌랴. 이론가는 그저 작곡가들이 지나간 길을 정리하며 쫓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SNU New Music Series. Studio 2021 News Letter No.3, 2007년 5월,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