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 타케미츠, 소리의 정원을 가꾼 작곡가」

1998년부터 발매되기 시작한 도이치 그라모폰의 “우리시대의 음악 20/21” 시리즈에는 일본 작곡가 타케미츠의 음반이 무려 다섯 장이나 포함되어 있다. 80-90년대 작품을 담은 《꿈의 인용》과 《나는 물이 꿈꾸는 것을 듣는다》, 일본 전통악기를 위한 작품들 《가을 정원에서》, 60-70년대 작품 모음 《정원 비》와 《오각형 정원에 내려온 새》에 이르기까지, 이 시리즈의 까다로운 선정 기준에 비추어볼 때 의외라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다. 하지만 그동안 출시된 수많은 타케미츠 음반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타케미츠는 연주자들이 좋아하는 현대 작곡가다. 세이지 오자와나 올리버 너센 같은 지휘자 뿐 아니라 기타리스트 존 윌리엄스나 플루티스트 패트릭 갈루아, 피아니스트 피터 제르킨에서 일본 전통악기 연주자에 이르기까지 그와 음악적 우정을 나눈 음악가들은 수도 없이 많다. 타케미츠 음악을 담은 수많은 음반들은 바로 그 만남의 결과이리라.

1930년 도쿄에서 태어난 타케미츠는 거의 독학으로 작곡가가 된 인물이다. 1950년 피아노곡 <두 악장의 렌토>로 작곡 활동을 시작하여, 1959년 일본 방문 중이던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현악을 위한 <레퀴엠>(1957)을 듣고 감동한 것을 계기로 일본 작곡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7년 뉴욕 필하모니 125주년 기념 위촉작인 샤쿠하치, 비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11월 단모노(November Steps)>가 오자와의 지휘로 초연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평생 전업 작곡가로 살면서 130여 곡에 이르는 작품과 93곡의 영화음악, 그 외에도 많은 편곡작품을 남겼다.

섬세한 음향 감각, 드뷔시의 후예

타케미츠의 작곡 인생에서 중요한 세 가지를 말해본다면, 드뷔시, 케이지, 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드뷔시는 타케미츠가 자신의 스승이라 말할 정도로 심취했던 작곡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각인된 최초의 음악적 경험이 열네 살 때 징용되어 군대에서 들은 조세핀 베이커의 샹송 “들려줘요 사랑의 말을(Parlez-moi d’amour)”이었고, 전후 미국 영화와 라디오를 통해 접하게 된 클래식 음악에서는 특히 드뷔시, 프랑크 등의 프랑스 음악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후 이치야나기를 통해 유럽 아방가르드 음악을 접하고는 메시앙의 음악에도 심취했다. 체계적인 구조화보다는 창조적인 직관에 따라 작업하고, 시나 회화 혹은 문학작품에서 연상되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섬세한 소리의 세계로 빚어내는 타케미츠가 드뷔시와 메시앙의 풍부한 관현악 색채나 화성 어법에 경도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다. 타케미츠의 작품에는 시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정원, 나무, 바다, 비, 물, 꿈, 가을, 풍경, 성운 등 자연이나 색채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관현악곡 <나무 음악>, <산호섬>, <그린>, <카시오페이아>, <가을>, <꿈/창>, 실내악곡 <가면>, <서예 소리>, <바다를 향하여>, <비가 오다>, <비 나무>, <오리온> 등등.

한편 케이지는 타케미츠가 일본 전통음악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 존재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적극적인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구해 온 일본의 50년대 작곡계는 서구 아방가르드 음악이 지배하고 있었다. 12음기법과 총렬음악, 구체음악과 전자음악, 우연성과 불확정성 원리 등이 작곡가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일본 전통음악을 창작의 화두로 삼는 작곡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군국주의 시대를 지나온 일본에서 ‘민족’이나 ‘일본적인 것’은 주요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2년 일본을 방문한 존 케이지는 직관에 의한 음악, 자연의 소리, 정적의 문제를 통해 서구 아방가르드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일본 작곡계에 “케이지-쇼크”라 할 만한 파장을 일으켰다. 가까운 친척 중에 고토 연주자가 있었으나 그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1958년 우연히 분라쿠 인형극에 나오는 샤미센의 독특한 음향세계에 매료되면서 조금씩 일본 전통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타케미츠 역시, 케이지와의 만남을 통해 일본 전통음악의 정수를 좀 더 깊이 천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와리’와 ‘마’: 일본 전통에서 길어 올린 사유

타케미츠는 일본 악기가 내는 소음 섞인 독특한 음향 ‘사와리(触り)’와 음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적의 순간인 ‘마(間)’에서 일본 전통 음악의 고유한 특징을 보았다. 하나의 음은 소음 섞인 복합적인 음향적 특질(‘사와리’)로 인해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므로 그 어떤 기능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 소리들 사이에 놓인 정적인 시간(‘마’)에 의해 비로소 음악적 연관을 갖게 된다. ‘마’는 결코 비어있는 무엇이 아니라, 수많은 음들 내지 소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11월 단모노>(‘단모노’는 여러 단락으로 이루어진 일본 전통 기악곡의 하나)에서는 샤쿠하치와 비와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에서도 소음 섞인 음향과 그 명상적인 시간성이 탁월하게 구현되고 있다. <빛의 소멸> (1966), <가을 정원에서>(1973) 이후 타케미츠는 전통악기를 위한 작품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박절적 시간에서 벗어난 유연한 음향 흐름과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내공을 지닌 타케미츠 음악의 고유한 특징은 일본 전통 음악에서 길어 올린 소리와 시간성에 대한 인식을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또한 타케미츠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1956년 <미친 과실>(나카히라 코 감독) 이후 40년 동안 총 93편의 영화음악을 만든 그는 매년 2-300편의 영화를 볼 정도로 엄청난 영화광이었다. 테시가하라 히로시,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과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고, 구로자와 아키라,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등의 영화음악도 썼다. 대표작만 하더라도 테시가하라의 <모래의 여인>, <타인의 얼굴>, <리큐>, 고바야시의 <할복>, <괴담>, 구로자와의 <도데스카덴>, <란>, 오시마의 <열정의 제국>, 이마무라의 <검은 비> 등 역사물에서 다큐멘터리에 이르는 굵직한 작품들이 많다. 그가 영화 음악에 입문하게 된 데에는 젊은 시절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던 하야사카 후미오(구로자와 감독의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의 작곡가)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단순히 한 예술가의 독특한 취미활동이거나 전업 작곡가의 생계를 위한 방편 이상의 것이었다. 소리에서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미지에서 소리를 듣는 공감각(共感覺)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서 음악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처럼 이미지들의 움직임인 영화의 시간성은 음악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타케미츠는 간파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지에 음악을 덧붙이는 것보다 소리를 잘라내고 줄이는 작업이야말로 영화 음악에서 중요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야만 영상 속에 이미 있는 소리를 듣게 할 수 있으므로.

소리의 정원사

일본의 전통 정원을 무척이나 사랑한 타케미츠는 다양한 자연의 재료가 조화를 이루는 그러한 일본 정원을 음악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작곡이란 구축되고 조직되는 훌륭한 건축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소리들이 서로 만나는 장소를 만드는 것, 사람들이 그곳에서 시간을 산책하며 거닐 수 있는 “음악의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았다. “나는 소리를 특정 방향으로 통제하기를 원치 않는다. 가능한 한 그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싶다. 내 주변에 있는 소리들을 모아 그들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타케미츠에게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거대한 악기가 아니라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원천으로 이해된다. 정원 속의 사물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 어둡고 구름 끼거나 비오는 날에 변화하는 자연의 색조들, 폭풍우칠 때 변화하는 형태들, 이런 것들이 다채롭게 나타나는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Arc>에서처럼 때로 독주악기는 정원을 산책하고 관조하는 관찰자의 역할을 한다.]

타케미츠가 가꾼 음악의 정원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작곡가의 삶 그 자체이고, 가까운 벗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들어와 즐길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거창한 이념이나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거나 강한 자극으로 각인되기보다는, 여러 소리들이 어울려 자연스럽게 흘러 지나가는 듯한 타케미츠의 음악은 분명 현대인들에게, 낯설지만 편안하게 다가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내공의 소리 세계를 선사한다. 마치 도심 안에 있는 고요한 산사처럼.

『객석』 2007년 8월호, 108~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