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 비전을 실현하는 소리의 마술사, 진은숙의 음악세계」

진은숙의 음악은 청중을 매료시키는 묘한 파워를 지니고 있다. 명징하면서도 다채롭고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음향 이미지들, 명료한 구성과 그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복합적인 소리의 층들. 청중들은 그녀의 음악에서 정교하게 세공된 음향적 색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된다.

진은숙은 작품을 많이 쓰지 않는다. 작품만으로 먹고사는 전업 작곡가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작품의 질적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이 원칙을 고수한다. 그래서 1985년 이후 작곡 활동을 시작한 이래 작품 수가 20여곡에 불과하다. 심지어 예전에 쓴 곡 중 마음에 들지 않은 곡은 작품 목록에서 삭제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질적 완성도를 추구하기에 그녀의 작품들은 세상에 나온 이후 꾸준히 계속 연주되며 청중과 만난다.

인성, 유머, 난센스, 유희

어느 작곡가에게나 명성을 안겨다 준 출세작이 있게 마련이다. 진은숙에게는 <말의 유희> (1991/93)가 그런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소프라노와 9명의 연주자들이 유머와 난센스로 가득 한 “말의 유희”를 7개의 다채로운 장면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인성, 특히 소프라노는 진은숙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악기’다. 첫 대표작이라 할 <트로이의 여인들>(1986/90)과 <칼라>(2000)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지만, “소프라노 가수”를 의미하는 <칸타트릭스 소프라니카>(2004-05)에서는 아예 작품의 소재로까지 등장한다. 노래 부르는 행위 자체를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한 이 작품은 말의 유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음악적 ‘유희’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녀에게 소프라노는 인간의 목소리가 지닌 화려하고 거장적인 면모를 전달하는 최적의 매체인 듯하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주인공 ‘앨리스’ 뿐 아니라 ‘체셔 고양이’, ‘여왕’이 맡은 서로 다른 성격의 소프라노들이 이 오페라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가지 않던가.

협주곡, 대가적 기교성과 다채로운 관현악 음향의 결합

인성을 포함한 작품과 더불어 진은숙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장르는 협주곡이다. 연주자가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협주곡은 20세기에도 여전히 각광받던 장르였다. 진은숙에게도 협주곡은 연주자의 열정과 대가적 기교성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매체다. <피아노 협주곡>(1996-97), <바이올린 협주곡>(2001),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이중 협주곡>(2002) 등에서 그녀의 음악적 상상력은 악기의 잠재적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독주 악기에서는 물론이고 관현악 음향에서도 빛을 발한다. 전통적인 형태의 관현악 음향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탐색해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타악기를 독특하게 배합함으로써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독창적인 관현악 음향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 세 협주곡들에서는 가믈란 음악의 구조적, 음향적 측면이 다양한 방식으로 스며들어 있다. 물론 각 협주곡의 기본 아이디어는 협연 악기에 따라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내년에 초연 예정인 <첼로 협주곡>과 <생황 협주곡>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면모를 들려줄지 무척 궁금하다.

진은숙 음악의 매력인 섬세하고 미묘하게 분광하는 다채로운 음향 팔레트는 몇 주 전 초연된 <로카나>(2008) 같은 관현악곡 뿐 아니라 전자음향을 포함한 앙상블 곡에서도 잘 나타난다. 현악사중주와 전자음향을 위한 <파라 메타 스트링>(1996), 타악기와 전자음향을 위한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1998), 앙상블과 전자음향을 위한 <씨>(1998), 바이올린과 전자음향을 위한 <이중 구속?>(2007) 등은 전자음향과 결합되어 무궁무진한 음향적 가능성을 펼쳐낸다.

청중과 소통하는 현대음악을 위하여

진은숙의 음악은 구성이 명료하고 복잡하지 않다. 그렇다고 음악 자체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녀는 음악이 청중과 교감해야지 자폐증환자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0세기 후반 유럽 아방가르드 음악을 주도했던 현학적인 현대음악의 흐름과 거리를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중의 취향에 맞춰 듣기 쉬운 음악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음악은 일반 청중에게 어필하면서 동시에 심층적인 의미를 내포한 음악, 단순함 속에서도 복잡함이 있고, 직접적인 표현 너머에 다의적인 은유가 숨겨진 음악이다. 작년에 초연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장면 장면마다 다양한 음악 양식이 구사되고, 유머와 패러디, 은유와 상징이 다채로운 음향 세계와 함께 존재한다.

이 오페라의 시작과 끝은 작곡가의 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꿈은 비단 이 오페라에서만이 아니라 그녀의 작품 전반에서 창작의 흥미로운 원천이다. 그런 점에서 진은숙은 꿈속에서 본 빛과 색채의 현란한 비전을 현실 세계의 음악으로 빚어내는 소리의 마술사가 아닐까.

『객석』 2008년 4월호, 104~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