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의 초상. 강준일의 4 Trios」 (미래악회 16회 작곡가의 초상 강연 원고)

작곡가 강준일의 음악 세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음악학자 이희경입니다.

오늘 미래악회 제16회 작곡가의 초상 ‘강준일의 4 Trios’ 연주회에 참석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연주회에 앞서 작곡가 강준일의 음악 세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작곡가 강준일은 한국의 작곡계에서는 다소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세대 대부분의 작곡가들처럼 유학을 갔다 오지도 않았으며, 평생 전업 작곡가로서 살아왔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1944년 생으로 1963년, 당시 한국 최고의 수재만 들어간다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한 그가 졸업 후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 데에는, 그 자신의 말처럼, 어떤 숙명이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1966년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 음대에 들어갔으나 1년도 못 되어 부친의 사업 실패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그 후 1년 정도 지방을 전전하며 인생의 밑바닥에서 깨달은 것이 “모든 걸 다 버려도 음악과는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합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교회에서 피아노를 빌려 연습하고, 학림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음악을 듣고, 당시 서울음대 학생들과 캠프를 조직하면서, 그렇게 강준일의 음악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작곡가 강준일을 있게 한 중요한 두 가지 원천을 들자면 물리학과 서울음악학회(SMA)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곡을 제대로 가르쳐 줄만한 사람이 없던 시절, 작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때문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방황하던 그에게, 어떤 현상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은 음악의 표현 방법을 찾아가고 소리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할 수 있게 하는 사유의 토대였습니다. 말하자면 독학으로 작곡가가 된 강준일에게 물리학은 스스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게 한 조건이었던 셈입니다. 그가 이후 우리 소리의 본질을 통찰해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창작적 문제의식을 이론화하는 데에도 물리학의 경험은 큰 사유의 틀을 제공했습니다. 한편 1968년 조직했던 음악캠프를 계기로 1970년 발족된 서울음악학회(SMA)는 그의 음악 인생 그 자체라 할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1970년대 SMA 앙상블과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한 편곡작업을 하면서 곡을 쓰는 실질적인 연습을 할 수 있었고, 뜻이 맞는 음악 동료들-지금은 모두 한국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과 함께 회관을 만들어 함께 일상을 공유하며 미친듯이 음악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대위법, 화성법, 음악분석, 음악사, 관현악법 등 그 모든 것이 – 도움을 받은 스승 혹은 선배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 독학으로 이루어졌고, 그 공부의 성과가 매년 두 번 열렸던 캠프를 통해 동료와 후배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40년 동안 계속되어 온 SMA의 역사는 작곡가 강준일이 일궈나간 음악에 대한 열정과 고민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한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하겠지만, 젊은 시절 어떤 사건, 어떤 인물 혹은 어떤 작품을 만났는가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해방을 전후로 태어난 그의 세대는 어린 시절 전쟁을 겪었으며, 청소년기에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를 경험했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 20-30대를 보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시기는 국가 주도의 근대화가 경제개발 논리와 함께 전 사회를 변화시켜갔고, 그 과정에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 특히 민속 문화에 대한 관심이 일던 때였습니다. 20대 중반이던 1960년대 말 강준일은 우연히 ‘가락동인회’라는 모임에 관여하게 됩니다. ‘가락동인회’는 초대 박물관장을 지낸 민속학자를 비롯한 몇몇 뜻있는 어른들이, 당시 삶의 터전을 잃고 힘겹게 살아가던 전통음악 명인들을 모셔다 연주도 듣고 녹음도 하는 일종의 국악감상모임이었습니다. 여기서 강준일은 명인들을 모셔오고 모셔다드리는 실무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 때 신쾌동, 지영희, 김소희, 박귀희 같은 명인들을 만나고 이들의 음악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전통음악을 그 본질로부터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30대 중반이던 1970년대 후반 김덕수, 김용배 등으로 시작된 사물놀이의 탄생 과정을 직접 지켜볼 수 있었던 것 역시 작곡가 강준일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사물놀이 협주곡 <마당>(1983)과 <푸리>(1983) 등은 사물놀이에 대한 깊은 천착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대표작의 하나인 <만가>에서 나타나는 무속적인 특징 역시 젊은 시절 그가 접했던 민속음악의 영향이 아닐까 합니다. 강준일은 70년대 근대화와 기독교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미신타파로 치부되던 ‘무속(巫俗)’이 실은 한국 전통문화의 원류이며, 하늘의 섭리와 인간의 삶을 아우르는 인간 본연의 감성이라는 통찰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양식의 굿 음악이야말로 우리 전통 음악의 고유함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무속적인 것은 강준일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굿을 소재로 작곡된 <해맞이 굿>만이 아니라, 사물놀이 관련 작품들, <구음을 위한 소리타래> 시리즈 등 작품 곳곳에서 그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가 묻어나곤 하니까요.

이렇게 전통문화, 특히 민속악과의 인연은 강준일의 음악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였습니다. 그런데 강준일의 전통에 대한 관심은 당시 많은 작곡가들이 그러했듯이 음계나 리듬패턴 혹은 특정한 화성이나 민속적인 선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전통 소리가 갖는 고유한 모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소방울이나 사립문에 걸린 종소리들은 서양음악의 완전5도나 3화음이 아니라 증4도와 완전5도가 공존함으로써 서로 상생, 상극하며 부딪치는 소리라는 사실, 징소리는 음~매에 하는 오뉴월 황소울음 소리 같아야 하며 장구의 북편과 채편은 5도가 아닌 증4도로 맞춰야 더 생생하다는 옛 악인들의 얘기 속에서 강준일은 우리 소리의 본질이 항상 변화하며 살아 움직이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리들이 어떻게 살아있는가를 듣는 것이 우리 전통음악을 이해하는 첩경이며, 이런 살아있는 소리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가 작곡가의 과제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소리, 근대적인 체계 속에서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소리를 음악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소리의 사상적 토대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이치에 있다고 보았고,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체계와 이념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강준일은 전통음악의 특정 요소를 가져다 곡을 쓰는 방식이 아니라,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전통음악의 구성 원리와 그 정신적 가치를 작품 속에서 음악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추상적인 관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쓰는 음 하나하나에서부터,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를 낳게 만들고, 선형적인 텍스처 같은 우리 음악의 특이성, 우리 악기의 음조나 표현방식에 담겨있는 감성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전통’은 창작의 어느 단계에서 나타나거나 특정 장르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평생의 화두였습니다. 음악학자 이미경의 지적처럼, 강준일에게 전통은 ”추구해야 할 이상처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관념적인 것이거나, 작가의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한 재료가 아니”라, “삶 그 자체”, “나를 드러내는 순간 함께 엉켜져 나오는, 아니 나올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었던 것입니다.

강준일의 창작 활동은, 1970년 작 피아노곡 <봄> 이후 다양한 편곡 작업과 앙상블곡, 무용곡을 쓴 70년대 습작기를 지나, 80년대 초 <만가>와 사물놀이 협주곡 <마당>을 통해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마당>과 <푸리>, 사물놀이와 피아노를 위한 <열 마당 열두 거리>(1983) 등은 사물놀이가 지닌 폭발적 에너지가 어떻게 작품이라는 틀 속에 들어올 것인가라는 고민에 대한 답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반면, 90년대에 나온 서양 악기들을 위한 작품들,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삼행절곡>(1990), 첼로를 위한 <경기민요 주제에 의한 소곡>(1993),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허튼 가락>(1998),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슬픈 노래>(1998), <구음을 위한 소리타래>(1998) 등은 다양한 서양악기로 우리의 소리와 감성을 양식화하는 작업에 몰두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가 함께 만들어내는 앙상블곡이 두드러지는데, 피아노, 첼로가 장고와 어우러지고, 가야금과 현악사중주가 서로를 보듬으며, 해금과 바이올린, 클라리넷과 대금, 소프라노와 판소리 창자가 함께 하나의 앙상블을 만들어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전통 악기가 단지 특이한 음향적 재료로 사용되거나 서양의 평균율 체계에 흡수된 채 자신이 지녀왔던 소리, 음조, 표현방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함을 간직한 채 서양 악기와의 앙상블이 가능한 지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탐색의 과정은 서양악기 연주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이 다른 쪽의 소리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접속할 때 만들어지는 긴장 속에서 새로운 생성의 지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최근 강준일의 창작적 화두는 지난 수십 년간 시도해왔던 우리 소리의 본질을 이처럼 서양악기와 전통악기가 함께 빚어내는 새로운 앙상블을 통해 실현해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강준일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측면은 바로 연주자들과의 음악적 우정입니다. 자신의 음악을 나눌 수 있는 연주자들과 함께 음악은 한다는 것이야말로 작곡가로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긴 음악적 가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는 창작의 출발점이자 자신의 작품을 소리로서 세상에 선보였던 연주자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작품 목록만 살펴보더라도 그 변화를 알아볼 수 있는데요. 70년대 곡들은 SMA 앙상블과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위해 나온 것이었고, 80년대 중반까지 많은 수를 차지하는 무용음악들은 김복희․김화숙 무용단과 작업한 결과였으며, <마당>과 <푸리>는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아니었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1984년부터 매년 계속되어 온 ‘겨울나무’ 가곡발표회는 SMA의 성악가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90년대 기악 작품들 가운데 현악 앙상블이나 바이올린 곡이 많은 것은 김영준, 이보연 등 주변의 바이올린 주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40년 지기인 클라리넷 주자 오광호의 귀국으로 그를 위한 클라리넷 곡들이 많이 작곡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장고, 가야금, 해금, 판소리 등 전통음악 연주자들이 그에게 찾아오면서 전통악기를 포함한 앙상블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

오늘 연주회는 ‘4 Trios’라는 제목처럼 네 개의 트리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각기 우리의 전통 소리를 작품 속에 녹여내고자 한 강준일의 문제의식이 네 개의 서로 다른 편성과 작품 아이디어를 통해 어떻게 다양하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라 생각됩니다.

1990년 작곡된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삼행절곡>이 서양악기를 통해 소리가 소리를 낳는 생성의 과정을 아이디어로 하여 작곡되었다면, 2001년 요요마의 실크로드 프로젝트 위촉곡인 <해맞이 굿>은 동해안에서 동짓날 치러졌던 의식을 소재로 하여 실제 굿의 다섯 과정에 따라 구성된 곡입니다. 동일한 악기 셋, 그것도 고음역의 선율악기 세 대가 만들어가는 선형적 진행들의 텍스처로 이루어진 <삼행절곡>에서는 강준일 특유의 음악적 제스처도 함께 느껴집니다. 이와는 전혀 다른 편성인 첼로, 피아노, 장고의 트리오에서는 선율을 노래하는 첼로와 기운생동하는 소리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장고, 그리고 양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피아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감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첼로 선율의 섬세하고 미묘한 음조 변화와 이를 적절하게 뒷받침하는 피아노의 독특한 화음 취급 방식, 그리고 단순한 리듬 패턴이 아닌 작품의 역동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토대로서의 장단이 그때그때 음악적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는 것 등이 흥미롭습니다.

<해맞이 굿> 이후 강준일은 서양악기와 전통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다양한 실내앙상블을 시도했습니다. 그 중 <한거사락>(2004)과 <너름새>(2006)는 각각 클라리넷-대금-첼로, 그리고 피리-아쟁-비올라의 앙상블로 이루어진 트리오들입니다. ‘한적한 자연 속에서 느끼는 네 가지 즐거움’이란 제목의 <한거사락>이 예순이 된 작곡가의 일상을 담고 있는 풍경화 같다면, 작곡가가 판소리 공부를 통해 얻게 된 해학적이고 극적인 제스처를 표현하는 <너름새>는 일종의 풍속화처럼 느껴집니다. 클라리넷, 대금, 첼로라는 편성과 피리, 아쟁, 비올라라는 편성은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작품의 기본 아이디어와 그것이 담고 있는 정서를 표현하는 데 아주 적합한 형태라 생각됩니다.

트리오라는 편성, ‘셋’이라는 수는 ‘둘’이나 ‘넷’과는 전혀 다른 앙상블의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셋이 각기 따로 혹은 다함께 결합되기도 하지만, 둘과 하나의 조합이 끊임없이 바뀌어가며 다채로운 변화와 긴장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연주되는 네 개의 전혀 다른 트리오 편성이 각각 어떤 앙상블을 빚어내는지 흥미진진하게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다른 네 개의 작품 속에서 강준일 고유의 음악적 체취를 함께 느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

강준일의 음악은 무엇보다 평생을 창작 활동으로 살아온 한 작곡가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생 동안 하나의 화두에 깊이 천착했다는 것, 더욱이 그 화두가 20세기 후반 많은 한국, 아니 아시아 작곡가들이 고민했던 전통의 문제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서양음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고, 그를 위해 평생을 바쳤기에, 유학을 가지 않고도 서양음악의 정신적 깊이를 그 본질에까지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전통음악 역시 그에게는 자신 앞에 놓인 음악적 재료가 아니라 정신적 고향이자 예술적 토대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서양음악을 우선 따라잡아야 할 ‘서구문물’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첫 세대이자, 전통음악을 ‘교육’이 아닌 자신의 ‘예술적 환경’ 속에서 체화한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런 그가 평생을 통해 벼려낸 작품 세계를, 네 곡의 트리오를 통해 만나보시겠습니다.

이제 음악회를 열겠습니다.

2008년 5월 16일, 미래악회 작곡가의 초상 16회 강연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