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벽두, 나흘에 걸쳐 진행되는 ‘에센츠 음악축제 2015’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의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AYAF: ARKO Young Art Frontier)’의 일환으로 마련된 행사다.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여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이 사업의 공연예술창작자 부문으로 선정된 서지훈은 자신의 작품발표회를 여는 대신, 이 지원을 젊은 작곡가들의 축제로 변모시켰다. 작품 공모를 거쳐 선정된 일곱 명의 작곡가들과 함께 하는 음악회를 기획한 것이다.
한국 예술계에서 창작음악은 오랫동안 사회 속에서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왔다. 1970년대 새로운 현대적 어법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후, 1980년대 서구 기법의 무비판적 추종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제기되며 ‘한국적 음악’을 둘러싼 논쟁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어떤 주류적 흐름이나 담론보다는 작곡가들의 개인적인 탐색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서 창조적 예술의 자리는 점차 줄어들었고, 언제부터인가 작곡가들의 창작곡 발표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 이러한 창작음악의 위기에 대한 인식은 작곡계 안팎에서 다함께 공감하는 일인 듯하다. 작곡계 내부에서는 한국작곡가협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들이 모색되고 있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한국 창작음악 진흥을 위한 원년’이라는 기치 하에 여러 정책적 대안을 마련한 바 있다. 그 중에는 신진 작곡가들을 위한 ‘창작음악 실험무대(생애 첫 작곡발표회)’도 있었다. 그밖에 서울시향이나 TIMF앙상블 같은 여러 음악단체들에서도 젊은 작곡가들에게 창작곡을 위촉하고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한국음악의 미래를 위해 젊은 작곡가들의 창작활동은 다각도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독려될 필요가 있다.
‘에센츠 음악축제 2015’는 무엇보다 젊은 작곡가들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개척하고 탐색해나가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이 음악축제를 통해, 젊은 작곡가들의 활동을 위한 국내외의 네트워크 형성은 물론이고, 축제행정 준비까지 젊은이들로 구성하여 음악기획자들을 양성하는 기회로도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창작음악 축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연주자와의 긴밀한 협업 역시 2013년 결성된 ‘베를리너 앙상블 에센츠’라는 연주단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비록 미약한 첫 시도일지는 모르나 ‘에센츠 음악축제’는 젊은 작곡가, 연주자, 기획자들이 함께 꿈꾸고 성장해가기 위한 의미 있는 출발임에 틀림없다.
연주자들과 작곡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음악회
‘에센츠(Essenz)’는 ‘본질’, ‘향기’라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천착, 향기로운 음악으로서 청중과의 괴리에서 벗어나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고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에센스’라는 영어 단어 대신 ‘에센츠’를 선택한 것은, 이 음악축제를 기획한 작곡가 서지훈과 연주단체 ‘베를리너 앙상블 에센츠’가 모두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라는 점에 일차적 이유가 있겠으나, ‘에센츠’라는 발음이 주는 특유의 어감도 작용했으리라. 이틀에 걸친 음악회에는 각각 “나무, 하늘을 껴안다”, “초록빛 몸짓 그리고, 아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서각(나무나 돌, 금속 등에 글씨나 그림을 새겨 넣는 예술 장르) 작가 서지영의 작품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 하는데, ‘나무’, ‘초록빛 몸짓’이 젊은이들의 혈기왕성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면, ‘하늘’은 이 젊은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닿을 수 없는 이상을, ‘아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차게 내딛는 새로운 출발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음악축제의 성격과 지향하는 바를 엿볼 수 있는 부제들이다.
‘에센츠 음악축제 2015’에서는 본격적으로 작가의 세계에 진입하는 20대 중반~30대 초반(1982~1988년생)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이 발표된다(공모 자격은 1978년 이후 출생이었다). 이 중에는 독일,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거나 이미 활동 중인 작곡가들도 있고, 대학 졸업 후 국내에서 작곡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이들도 있다. 연주를 담당한 ‘베를리너 앙상블 에센츠’ 역시 음악감독 곽태평(1985년생)을 비롯하여 대표인 피아니스트 문지영(1983년생)과 악장 정유진(1987년생) 등 20대 중후반이 주축이 된 비슷한 또래 음악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발표되는 여덟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이들의 음악적 고민이 어디에 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실존적 고민이 담겨진 곡도 있고, 동시대의 음악 형상화 방식을 탐색하는 곡들도 있으며, 주변의 사물이나 모습(물의 움직임, 돌, 공기놀이, 스포츠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한다. 이중주곡에서 앙상블 작품까지 여러 편성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상상력을 맘껏 펼쳐내고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형식 구성, 색다른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듯하다. 악기의 새로운 주법들을 폭넓게 실험하고 있다.
이번 음악축제에는 이틀간의 음악회 외에 2회에 걸친 오픈리허설과 워크숍이 함께 진행된다. 창작음악 연주회가 말 그대로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참여하는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이 서로의 음악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적 상상력을 악보 위에 고스란히 담아내려 애쓰지만, 그 음표들을 소리 울리는 음악으로서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것은 연주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고전이 된 음악 작품들이라면 앞선 연주자들의 다양한 해석이 준거가 되기도 하겠으나, 초연작의 경우에는 그 음들을 형상화하는데 연주자들의 음악적 상상력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하기에 초연작 발표 전 작곡가와 연주자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쉬이 가능한 일은 아니다. 세계 초연곡이 무려 일곱 곡이나 포함된 이번 음악축제에 초청된 ‘베를리너 앙상블 에센츠’는 현대 창작음악 연주에 뜻을 두고 결성된 단체이기에, 작곡가들과 연주자들 간의 음악적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까 기대된다. 비슷한 또래로서 음악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면, 서로의 예술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2회에 걸친 오픈리허설은 이러한 과정을 좀 더 심화시킬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오픈리허설은 일반 음악 청중들에게도 세계 초연되는 창작품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음악적 소통은 작곡가들과 연주자들, 그리고 청중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젊은 작곡가들이 서로의 음악적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고독한 창작의 길을 걸어가려 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함께 이 길을 가고 있는 동료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된다. 음악축제에 참가하는 작곡가들은 리허설 과정에서 서로의 음악을 듣고 경험하지만,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꺼내놓고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또한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회의 워크숍 가운데 한 번은 젊은 작곡가들끼리, 다른 한 번은 음악학자와 함께 진행된다.
첫 날 “나무, 하늘을 껴안다”
2014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참담한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졌다. 4월의 어느 봄날, 우리에게 전해진 끔찍한 소식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젊은 음악가들의 축제가 세월호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추모로 시작하는 것은, 세상과 호흡하며 자신이 사는 시대를 작품 속에 녹여내는 예술가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에센츠 음악축제 2015’의 첫 날 공연에서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와 작곡가 서지훈의 <엘레지>(2014)를 연주한다. 라벨의 곡이 300여명이 넘는 희생자들 가운데 다수였던 261명의 어린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선정된 것이라면, 서지훈의 작품은 ‘비가’, ‘만가’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희생자 가족들의 비통한 심정, 그 참사를 바라보는 전 국민의 애도와 비탄의 마음을 전하는 선곡이 아닐까 싶다.
잘 알려져 있듯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모리스 라벨(1875-1937)이 1899년 피아노곡으로 발표한 것으로, 1910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무엇보다 영화나 광고, 게임 등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사용되어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의 가면무도회 장면에 사용되기도 했고, 박민규 작가의 동명의 소설도 나온 바 있다. 이 곡은 라벨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벨라스케스의 그림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목의 ‘죽은 왕녀’는 ‘infante défunte’이라는 불어 운율과 어감이 좋아 붙인 것일 뿐, 정작 작곡가는 스페인 궁정에서 춤추는 어린 왕녀를 상상하며 쓴 곡이라 한다. 실제로 ‘파반느’는 16-17세기 스페인과 이탈리아 궁정에서 추던 느린 행렬 춤이다. 작곡가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이 작품은 22살에 세상을 떠난 마르가리타처럼 이른 죽음에 대한 장송곡으로 연주되곤 한다. 이 곡의 처연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은 그로 인해 더더욱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이번 공연에서는 박강준이 편곡한 앙상블 곡으로 연주된다.
서지훈(1982-)의 <엘레지(Élégie)>는 제목이 암시하듯 전반적으로 저음역의 어두운 음색과 슬픔의 정조가 두드러진다. 곡의 전반부에서는 단2도와 장3도의 선적인 움직임과 스타카토로 맺는 음악적 제스처가 곡을 이끌어가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작용한다. 저음역에서 빠르게 몰아치는 피아노로 시작되는 중간 부분은 첼로와 바이올린이 합세하며 복받치는 감정을 표출한 후, 그 감정을 추스르듯 세 악기는 각자의 역할을 조금씩 정리해나간다. 세월호 참사 이전인 2014년 2월에 작곡된 이 곡의 악보에는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Ich, Überlebende)>(1944)이 인용되어 있다. 어린 생명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단순히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두 곡에 이은 네 작품은 모두 에센츠 음악축제 공모에 당선되어 오늘 세계 초연되는 곡들이다. 장한솔(1982-)의 <신비한 돌(Mysterious Stone)>은 섬세한 사운드의 미묘하고 다채로운 변화를 탐색하는 듯한 곡이다. 곡 전반에 걸친 신비로운 아우라는 플루트와 클라리넷의 바람 섞인 소리들과 현악기의 다양한 하모닉스 음향에서 일차적으로 비롯된다. 이 작품에서 피아노는 건반악기가 아닌 ‘스트링 피아노’로서, 현악기의 하나로 사용된다. 또한 현악 주자들은 미세한 음색변화를 만들어내는 현대음악의 온갖 주법들을 구사해야 하며, 두 명의 목관 주자에게도 플래터텅잉과 글리산도, 트레몰로 외에, 공기의 유입과 하모닉스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주법들이 요구된다. 그러한 각 악기의 사운드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음향복합체와 그것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작곡가는 빛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신비로운 돌, ‘려’의 이미지를 그려보고자 한 것이리라.
반면, 홍윤경(1984-)은 ‘물’의 유동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곡을 썼다.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6중주곡 <물의 움직임(Fluidity)>은 조수간만에 따라 섬이 되었다 육지가 되었다 하는 프랑스 몽생미셸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으로, 네 개의 악장은 각각 물의 여러 형태와 움직임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악장이 지속음과 유려한 선율 선들로 잔잔히 흘러가는 물의 움직임을 나타낸다면, 피아노와 목관악기들의 빠른 패시지로 속삭이듯 시작되는 2악장은 조수 때문에 벌어지는 바닷물의 빠른 움직임을 역동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한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묘사하는 3악장에서는 여섯 악기의 각기 다양한 피치카토와 스타카토 주법으로 점차 복잡해져가는 물방울들의 앙상블을 들려준다. 하나의 물줄기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마지막 4악장은, 여섯 악기의 유니슨으로 시작하여 점차 성부가 갈라져나가 제각기 서로 다른 음형들을 연주해가다, 다시 한데 어우러지며 시작 부분의 유니슨으로 통합되고 좀 더 큰 흐름으로 나아간 후, 마지막에는 피아노와 목관악기들의 지속음만 남아 서서히 사라져가듯이 끝난다.
이지헌(1988-)의 바이올린 이중주곡 <발가벗은 조각들(Frank Fragments)>은 작곡가의 실존적인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 설명에서 작곡가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내 안의 여러 모습들, 기쁨과 비탄이 공존하고, 하나의 내가 또 다른 나를 부정하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여, 이 조각조각 흩어진 나의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두 대의 바이올린은 그런 분열된 자아의 음악적 페르소나일까? e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첫 단락에서는 바이올린 1만 등장한다. 이어지는 하모닉스 단락에서 비로소 합류한 바이올린 2는 바이올린 1과 어우러져 음악적 텍스처를 만들어간다. 피치카토와 활로 켜기가 정신없이 교체되다가 마지막에 다다르면 하모닉스 트릴이 계속 이어진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내 자아의 그림자처럼 활동했던 바이올린 2가 사라지고, 결국 혼자 남은 바이올린 1은 버르토크 피치카토로 단호함을 내보인 후 e-a의 완전 4도로 곡을 마무리한다. 상념을 떨쳐버리고 뭔가 새로운 다짐을 하듯이.
마지막 곡인 이철(1984-)의 <공기놀이(Gonggi)>는 어린 시절 모여앉아 즐겨 하던 놀이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하지만 작곡가의 설명처럼 이 곡은 공기놀이를 상상하게 하는 묘사음악이 아니며, 사용되는 주요 음들을 각각의 색깔과 무게를 지닌 공기 돌처럼 특징적인 모습으로 설정하고(피아노의 다섯 음들의 줄에다 클립을 잔뜩 끼워놓아 하프시코드 같은 소리를 내게 만든 것은 그 한 예이다), 그 음들을 구조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공기놀이의 순서와 방법을 적용시켜 만든 곡이다. 규칙이 있는 게임이나 놀이를 작곡 과정에 끌어들이게 되면 곡을 전개시켜갈 때 흥미로운 구조적 준거가 될 수 있다. 곡의 시작부분에서 공깃돌을 흔들고 하늘로 던져 올리는 공기놀이의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 작품의 구성은 특징적인 여러 음형들이 서로 얽혀 들어가며 각 단락의 고유한 음악적 제스처를 제시하고, 그 속에서 어떤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고 풀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날 “초록빛 몸짓 그리고, 아침”
축제의 이튿날 연주회는 피아노 독주곡으로 시작한다. 니콜라이 카푸스틴(1937-)의 곡은 요즘 젊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사랑받는 레퍼토리의 하나이다. 우크라니아 태생의 이 작곡가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즘과 즉흥적인 재즈를 넘나드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한데, <여덟 개의 연주회용 연습곡>(1984) 작품 40번은 카푸스틴의 재즈적 리듬과 특유의 피아노 서법이 잘 드러나는 곡이다. ‘연습곡’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맞게 기교적인 측면이 두드러지며, 쇼팽과 리스트의 연습곡은 물론이고 재즈나 록 음악의 요소도 녹아있다. 그 중 오늘 연주될 1번 “전주곡”은 시작부터 끝까지 화려하고 현란한 리듬으로 점철된 역동적인 곡이다. 다양한 형태의 당김음과 붓점 리듬이 사용되며, 피아노의 타악기적인 면모가 십분 발휘된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축제에 부합하는 첫 곡이 아닐 수 없다.
이어지는 작품은 2014년 6월 ‘베를리너 앙상블 에센츠’의 베를린 공연에서 초연된 서지훈의 <영토(Territoire)>(2014)이다. 작곡가의 곡 해설에 나오는 인용문은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11장 “리토르넬로에 관하여”의 첫 단락이다. ‘리토르넬로’란 반복을 통해 질서 혹은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말하는데, 이 장에서 저자들은 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하는 리토르넬로의 역할에 주목한다. 하지만 작곡가가 영감을 얻은 것은 아이의 노래가 카오스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간다는 이 단락의 시적인 은유인 듯하다. 이 곡에서 바이올린과 목관의 서정적인 선율이나 피아노의 지저귀는 듯한 소리는 여러 음악적 진행들을 묶어주고 곡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노래처럼 들린다.
문석민(1986-)의 <유기체(Organism)>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전통적인 악곡 구성방식이 오늘날 어떻게 새롭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곡이다. 사실 소나타 형식만큼 기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흔치 않다. 그 토대가 되었던 조성이라는 지반이 균열된 이후에도 작곡가들은 주제의 변형, 발전이라는 악곡 구성방식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석민도 바로 그 지점에 천착한다. 도입부에 나오는 피아노의 빠르게 상행하는 패시지, 현악기의 피치카토와 반복 음들, 클라리넷의 선율은 이후 곡의 진행 과정에서 계속 모습을 달리하며 등장한다. 때로는 하나가 집중적으로 다뤄지기도 하며, 새로운 음악적 제스처가 나와 또 다른 연관을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반면, 김용환(1988-)의 <디베르티멘토>는 21세기적 희유곡이라 할 만하다. 야구경기의 느낌을 음악으로 나타내 보겠다는 발상은 작곡가가 야구팬이라면 충분히 해봄직한 생각이다. 멕시코 작곡가 엔리코 차펠라는 1999년 멕시코가 브라질을 상대로 승리한 역사적인 축구 경기를 음악으로 그대로 재현해내지 않았던가. 오늘날 스포츠만큼 사람들이 쉽게 희열을 느끼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작곡가는 18세기 궁정에서 가볍게 즐기는 기분전환용 음악 ‘디베르티멘토’를 작품 제목으로 가져왔다. 이 곡은 아주 고요하게, 여느 현대음악처럼 하모닉스와 트레몰로, 글리산도가 난무하는 짧은 패시지들의 연결로 시작된다. 하지만 곡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다채로운 음악적 제스처들이 여기저기 두드러지다가, 중반 이후를 넘어가면 점차 전통적인 선율이나 화성, 박절적인 리듬이 전면에 등장하며 환희에 찬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마치 극적인 역전승이 벌어진 경기장의 분위기처럼. 마지막에 다시 시작부분의 고요함으로 잠시 돌아오지만 곧이어 거칠게 몰아치며 끝이 난다. ‘디베르티멘토’의 성격에 부합하는 신나는 결말이다.
부다혜(1988-)의 <소리가 보인다(Le son se voit)>는 클라리넷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곡이다. 청각적인 소리를 시각화하는 일은 사실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지만(기보법의 탄생 자체가 그 한 예다), 청각과 시각이 연동되는 공감각적 인식은 20세기 들어 본격화되었고, ‘사운드 아트’의 등장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소리가 보인다’는 뜻은 소리가 우리의 청각 속에서 이미지화된다는 의미인 듯하다. 청각적 소리가 시각적 이미지처럼 그려지려면 그 소리들이 각기 뚜렷한 특징을 지닌 음악적 제스처로 인지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곡에서 작곡가는 서로 다른 특징적인 다섯 개의 소리를 연결하여 음악을 구성한다. 시작부터 다채로운 뉘앙스의 소리를 구사하던 첼로와 클라리넷은 점차 고삐가 풀린 듯 자유분방하게 소리를 내다가, 세 번째 단락에 이르면 첼로는 공명통을 두드리기도 하고 베이스 클라리넷이 등장하여 들숨과 날숨으로 소음 섞인 소리를 구사하기도 한다. 빠르게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네 번째 단락이 지난 후, 마지막 단락에서 클라리넷과 첼로는 한 음을 함께 연주한다. 같은 리듬으로, 때로는 서로 어긋나게.
이번 축제의 마지막은 서지훈의 <리좀>으로 장식된다. 이 작품의 제목은 축제 기획자인 서지훈의 예술적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리좀’은 에센츠 음악축제의 로고 이미지로도 사용되었다). 들뢰즈의 용어인 ‘리좀’은 뿌리줄기를 의미하는데, 모든 것이 하나의 위계구조로 환원되는 근대적 사유체계를 넘어, 여러 개의 중심이 공존하며 위계 구조화되지 않는 새로운 인식틀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다. 첼로와 10명의 음악가를 위한 이 작품은 첼로 협주곡의 외양을 띠지만, 협연자는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존재라기보다 11번째 멤버로서 앙상블과 한데 어우러진다. 대조와 경쟁보다는 협업에 좀 더 비중이 있는 것이다. 독주 첼로는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등장하며 때때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앙상블 파트와 더불어 복잡한 음향직조물을 만들어나간다. 제목처럼 이 곡은 선율들이 계속 이어지며 줄기들이 여기 저기 뭉쳐 어떤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가변적 다양체(multiplicity)’의 형상화라 할 만하다.
“The Show must go on”: 축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더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요즘처럼 젊은이들이 힘든 시기는 없었던 듯하다. 이토록 팍팍한 현실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것, 그것도 니치에 놓인 현대음악 작곡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에센츠 음악축제의 총감독 서지훈은 이 축제를 기획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 예술가들이 4대 보험 가입 유무라는 잣대에 의해 실업자로 평가된다는 소식을 독일에서 건네 들었다. 기회도 부여하지 않고 금전적 수입으로 그들의 꿈을 평가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재된 가혹행위이다. 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신을 돈으로 평가하게 하는 사회를 조성하는가. 선평가로 그들의 열정을 가늠하기 이전에 작품을 실현할 기회를 부여하고 예술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기본적인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이 먼저 생각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
오늘날 모든 것이 금전적 가치로만 귀결되는 한국 사회에서, 선함과 아름다움 같은 정신적 가치는 빛을 바랜지 오래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라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때일수록, 예술가들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 더욱 절실하다. 그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오롯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을 독려하고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것은 단순히 지원금을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예술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 기성세대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고 그들의 창의성이 온전히 발현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 그것이 암담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한 가닥 희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기획부터 연주, 작곡까지 젊은 음악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에센츠 음악축제 2015’는 일회성의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의 시도가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되어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또 다른 씨앗이 여기 저기 생겨날 수 있도록 물을 주고 가꾸어가는 것은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마지막으로 냉혹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도 묵묵히 예술가의 길을 가는 젊은 작곡가들에게도 한 마디. 창작은 결국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문제에 예민한 더듬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할 때 비로소 나와 내 작품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어떤 접점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의 고민이,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맥락 속에 있는지를 사유할 수 있을 때, 개인의 예술세계도 더욱 깊고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결코 쉽지 않을 그들의 앞날에, 그럼에도 창대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기를…
2015. 1.7~8. 에센츠음악축제 프로그램 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