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김희라의 2015년 신작 <모노Mono>는 보이스 퍼포머, 타악기와 라이브 일렉트로닉을 위한 1인극이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기대Erwartung>(1909)나 프란시스 풀랑크의 <인간의 목소리La La voix humaine>(1958)처럼 여성 성악가가 극의 전체를 끌고 가는 ‘모노드라마’의 형태를 띠지만, 20세기 초·중반에 나온 관현악 반주의 <기대>나 <인간의 목소리>와 달리 ‘성악가’가 아닌 ‘보이스 퍼포머’가 녹음된 소리, 실시간 제어 전자음향, 타악기를 배경으로 만들어내는 21세기형 새로운 형태의 음악극 혹은 소리극이다.
제목에서 암시되듯 보이스 퍼포머의 “독백(모놀로그)”에 집중된 이 작품은 두 대상(화자와 상대 혹은 두 오브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독백자의 넋두리를 주 내용으로 한다. 15장으로 구성되며 45분여 동안 휴지부 없이 각 장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텍스트는 다양한 문학 작품들에서 발췌한 것이지만, 각 장은 내용면에서 서로 연관된다기보다 오히려 각 장의 독백에 존재하는 감정선의 연결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작곡가는 텍스트의 내용을 음악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백에서 환기되는 여러 이미지나 상징적 단어들을 소리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작곡가 자신의 말처럼 “독백의 음악 모음곡”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구성과 관련하여 작곡가는 내면의 심리가 전개되는 극적인 소설의 형식을 차용했다고 한다. 배우 한 명이 극을 이끌어가며 다른 배우들은 그 사이에서 침묵의 퍼포먼스를 행하는 마르게리트 뒤라스의 <파란 눈 검은 머리Les yeux bleus cheveux noirs>(1986)의 전개방식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흘러가기 보다는 예기치 못한 환상이 중간 중간 끼어들며 내면의 숨겨진 감정들이 드러나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뒤라스의 소설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준거가 된 것은 풀랑크의 <인간의 목소리>이다. 장 콕토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이 모노오페라는 전화기를 붙잡고 끊임없이 소통을 갈망하는 버림받는 여인의 불안한 내면을 다룬 것인데, 마지막에 여인이 전화기 줄로 자신의 목을 감는 것으로 끝이 난다. 현대인이 겪는 소통의 불완전함과 단절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람 사이의 관계에 천착해 온 김희라가 1인극 <모노>라는 작품을 구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5장의 텍스트는 뒤라스의 <파란 눈 검은 머리>와 풀랑크의 <인간의 목소리>가 주축을 이룬 가운데, 영국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의 <문제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에서 인용한 문장을 시작으로,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 <모음Voyelles>, 스웨덴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줄리 양Miss Julie>,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시 <갈까마귀The Raven>, 뒤라스의 또 다른 소설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Coup de des…>의 텍스트들이 사용된다. 이 텍스트들은 여러 관점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를 주제로 삼고 있는 것들이다. 물론 매우 은유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다뤄진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보이스 퍼포머가 만들어내는 온갖 소리 행위들과 그로부터 전해지는 다양한 질감의 감정들이다. 우리가 흔히 오페라나 음악극에서 듣는 종류의 아리아나 레치타티보 같은 ‘노래’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목소리가 표현해낼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말과 음악 사이의 폭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다채로운 창법으로 구현된다. 20세기 후반 실험적인 현대 성악곡들에서 빈번히 사용되었던 음성학적 표현과 중얼거림, 속삭임 같은 형태는 물론이고, 배음창법과 임의적인 리듬의 가사부침새 등이 자유롭게 구사된다. 또한 보이스 퍼포머가 내는 소리는 실시간 으로 전자음향으로 변조되기도 하고, 숨소리, 소음, 건조하게 텍스트 읽는 소리들이 녹음되어 스피커로 흘러나오며 현장의 목소리들과 뒤섞인다. 타악기는 극히 절제되어 사용되는데, 4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정주Singing Bowl와 징은 특유의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마지막까지 간간이 들려오고, 9장에 나오는 장구는 고유의 주법과 현란한 독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번 김희라의 신작 <모노>는 지난 몇 년간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해 온 것들의 성과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보이스 아티스트 프라우케 아울베르트와의 만남을 계기로 구상되었고, 그녀의 폭넓은 음악적 표현력과 연행 작업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음악극적인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별도의 연출자 없이 작곡가가 직접 무대 위에서의 움직임과 영상 이미지의 내용까지 악보에 지시해놓은 연주회용 작품이면서, 그야말로 소리를 중심으로 한 멀티미디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3차원적 공간감을 갖도록 관객석 좌우 앞뒤와 무대 앞뒤와 천장에도 스피커를 설치했다. 이제 소리와 움직임과 이미지가 빚어내는 인간 감정들의 다채로운 양상들을 음악적 독백들의 모음곡으로 만나보자.
김희라 신작 <모노> 프로그램 해설. (2015.11.4. LIG ART HALL 합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