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첫 ‘음악 전시’ 구상 (이희경)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현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백남준이 청년 시절 음악도였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해방정국 한국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도쿄대 미학과에서 현대 작곡가 쇤베르크로 졸업논문을 쓴 후 현대음악을 더 공부하러 독일로 건너갔다. 백남준의 초기 작품들에는 ‘연습곡(에튀드)’ ‘소나타’ ‘교향곡’ ‘변주곡’ ‘세레나데’ ‘바가텔’ 같은 음악 용어들이 붙어 있다. 물론 그 용어에서 기대하는 전통적인 음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말이다.

백남준 탄생 90주년을 맞아 ‘전시’되는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작품일까. 왜 우리는 이 교향곡을 듣기 위해 공연장이 아닌 전시장으로 온 것일까. 1940년대 식민지 조선의 소년이 꿈꾸었던 새로운 음악의 비전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일본으로, 독일로, 미국으로 옮겨가며 어떻게 확장되어간 걸까. 이번에 처음 소개되는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은 백남준 예술 여정의 출발에 주요 단초가 되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했던 건 그만큼 방대하고 복잡한 작업이었기 때문일 터.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백남준의 초기 활동과 당시 현대음악의 상황을 재구성하며 60년 전 백남준의 문제의식을 추적해본다. 

1. 음악가 백남준의 궤적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어려서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한반도에 서양음악이 유입된 초창기에 이 신문물을 접한 이는 소수였지만,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이나 미국 혹은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난파ㆍ안기영ㆍ채동선ㆍ현제명 같은 음악가들이 활동 기반을 넓혀가고 있었다. 1932년생 백남준은 중등학교에 들어간 후 이화여전 출신의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주목받던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처음 쓴 곡들은 김소월이나 정지용의 시에 붙인 <산유화> <향수> <먼 후일> 같은 가곡들이었다. 당시 한국 작곡가들은 주로 가곡을 썼고 가곡집 출판으로 이름을 알렸다. 1948년 11월 배재 강당에서 열린 박은용 독창회에 참석했던 백남준은 이날 연주된 곡 가운데 김순남의 노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에도 피아노 앞에서 그의 노래를 기억해 부를 정도였고, 1992년에는 월북 작가 해금 조치 후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이 ‘비운의 천재 작곡가’가 한국음악사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리는 자필 기고문을 『객석』에 보내기도 했다. 

열네 살이던 1946년경 백남준은 작곡가 쇤베르크의 이름을 처음 접하고 크게 매료되었다. 그가 ‘가장 극단적인 전위주의자’라 불렸기 때문이다. 당시 버르토크나 스트라빈스키 같은 현대 작곡가들이 알려져 있긴 했으나, 쇤베르크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보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시기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쇤베르크 악보는 피아노곡 op.33a(1929) 해적판이 유일했고, 음반도 초기작인 <정화된 밤>(1899) 정도를 겨우 들어볼 수 있었던 듯하다.1) 그의 음악을 처음 듣고는 “바그너식의 헛소리에 불과”함을 금세 알아차렸다고 했지만,2) 급진적인 사상을 따르던 청년 백남준에게 당시 쇤베르크는 수백 년 동안 유럽 고전음악의 문법이었던 조성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불협화음을 해방시켜 새로운 음들의 질서와 체계를 세우고자 한 가장 전위적인 작곡가였다. 그가 쇤베르크 연구로 대학 졸업논문을 쓴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부터 도쿄대 미학과에서 공부하는 동안 모로이 사부로(김순남의 스승이기도 하다)에게 작곡 개인지도도 받았다. 그때 버르토크 스타일의 12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현악사중주를 썼다는데, 콩쿠르에 지원했다 탈락한 후로는 작곡을 그만두려 했다고 한다.3) 1956년 대학 졸업 후 바로 독일로 가 뮌헨대에서 음악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처음으로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참석했다. 패전국 서독의 작은 도시에서 열린 이 음악제는 전후 유럽 아방가르드 음악의 메카로 전 세계에서 찾아드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아방가르드 정신에 매료된 극동의 아시아 청년에게 이 음악제는 반드시 가봐야 할 행사였다. 한국과 일본 잡지에 보낸 백남준의 참가기를 보면, 그가 이미 현대음악의 주요 이슈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8년 음악제에서는 미국 실험 음악의 대부 존 케이지의 등장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독일 주류 현대음악에서 진부함과 경직성을 느꼈던 백남준에게 케이지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 행보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1957년 가을학기부터 백남준은 다름슈타트에서 만난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를 따라 프라이부르크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하려 했다.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를 이끌던 볼프강 슈타이네케와 주고받은 서신들을 보면, 1957~58년 즈음 신라 향가에 따른 실내악곡 <폴리-헤테로포니>를 작곡하고 있었다. 소프라노를 포함한 10인 편성의 곡에 짧은 ‘구체음악’4)을 삽입하려 했지만 작업할 스튜디오를 찾지 못해 완성하지 못했다. 악보까지 동봉해 구체적인 사항을 의논한 걸 보면 백남준은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이 곡이 연주되길 기대했고, 슈타이네케 역시 발표 기회를 주려 했으나 결국 성사되진 않았다.5) 포르트너는 백남준이 전통적인 음악 관습보다는 일상의 소음이나 실험적인 작업에 관심이 있다고 여겨 작곡을 그만두고 쾰른에 있는 서독일방송국(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서 일해 볼 것을 권유한다. 

1958년 가을 쾰른에 정착한 백남준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ㆍ죄르지 리게티ㆍ마우리치오 카겔ㆍ코르넬리우스 캬듀 같은 작곡가들과 만났고, 마리 바우어마이스터ㆍ볼프 보스텔 같은 시각예술가들과도 교류하며 자신만의 ‘행위 음악(action music)’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 첫 작품인 <존 케이지에게 보낸 경의>(1959)에 이어, 케이지 넥타이 절단으로 유명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1960), <심플>(1961), <머리를 위한 선>(1961),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하나>(1962), <딕 히긴스를 위한 위험한 음악>(1962), <앨리슨을 위한 세레나데>(1962) 등으로 크게 주목받는다. 또한 <젊은 페니스를 위한 교향곡>,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 <미국 바가텔>, <라디오를 위한 소나타>, <교향곡 5번>, <로봇 오페라>의 텍스트 악보를 써서 여러 지면에 발표한다. 

1961년 쾰른에서 슈톡하우젠의 음악 연극 《오리기날레(괴짜들)》 공연에 참여하고, 196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와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국제 최신음악 페스티벌》을 공동 기획하며,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갔다. 당시 백남준은 행위 음악이나 퍼포먼스보다는 전자기술과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 꽂혀 미친 듯이 공부했고, 1963년 3월 부퍼탈 파르나소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에서 그 결과를 내놓았다. 행위 음악, 퍼포먼스 예술에서 비디오 아트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지대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뉴욕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행위 예술가로 활약하면서,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만나 음악 분야에서만 유독 금기시되던 성(性)을 주제로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1967)과 <TV첼로>(1971) 등을 발표한다.6) 이제 백남준은 음악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미디어를 장착한 융합 예술의 세계에서 자신의 예술적 비전과 상상력을 맘껏 펼쳐나간다. 

2. 초기 백남준의 행위 음악

1958년 12월 슈타이네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남준은 자신의 음악 방향을 이렇게 표명했다. 쇤베르크가 ‘무조성(atonal)’을 썼고, 케이지가 ‘무작곡(Acomposition)’을 썼으니, 나는 ‘무음악(Amusik)’을 쓰겠노라고.7) 쇤베르크가 수백 년 동안 서양음악을 지배해오던 ‘조성’의 세계를 벗어나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무조 음악의 세계를 개척했다면, 케이지는 음들을 구성하고 일관된 구도로 배치하는 ‘작곡’ 대신 음들이 스스로 울리게 내버려 두거나 작곡가의 의도를 없애버림으로써 전통적인 작곡 관념을 해체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음악’이라 불려온 것의 경계를 넘어 그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첫걸음인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는 일반 피아노와 형편없이 망가진 ‘장치된 피아노(prepared piano)’8) 및 스쿠터가 사용된다. 피아노는 건반으로도 연주되지만, 현악기나 타악기처럼 쓰이다가 결국 뒤집혀 쓰러지고 만다. 음악가는 신문을 읽고 관객과 얘기를 하며, 관객도 무대를 향해 폭죽을 던지고 유리잔을 깨며 행위에 참여한다. 미리 준비된 녹음테이프에서는 장난감ㆍ일기예보ㆍ뉴스ㆍ스포츠 중계ㆍ물 같은 갖가지 소리가 흘러나오고, 스쿠터가 무대 뒤에 도착하는 구상이다. 이는 1년 전 썼던 실내악곡 <폴리-헤테로포니>와는 전혀 다른 형태다. 관습적인 악기 구성도, 악보도 없다. “소리로 표현된 슈비터스”라는 설명처럼,9) 자유로운 소리들을 어지럽게 콜라주 해 ‘음악’에서 다다이즘을 더욱 밀고 나가 보려는 시도였다. 백남준의 첫 행위 음악인 이 작품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다섯 차례나 공연되었는데, 백남준은 매번 다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두 번째 행위 음악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는 관객에게 공격을 가한다. 쇼팽 피아노곡 발라드의 한 소절을 연주한 후 소리 지르며 울부짖다가 급격하게 내리치며 격하게 중단하고는 케이지에게 다가가 그의 셔츠와 넥타이를 자른다. 이어 케이지와 데이비드 튜더의 머리를 샴푸로 감기고 피아노로 돌아와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한 후 녹음테이프를 작동시키면 베토벤에서 스트라빈스키까지 각종 음악의 파편과 온갖 소리가 무질서하게 뒤섞여 나온다. 그리곤 밖으로 뛰쳐나가 전화를 걸어 관객에서 콘서트가 끝났음을 알린다. 백남준의 행위 음악은 갑작스러운 전환으로 관객의 감정과 심리를 휘어잡는다.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하나>에서는 깜깜한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홀의 조명을 비춤과 동시에 바이올린의 목을 양손으로 붙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갑작스레 내리쳐 부숴버린다. 관객은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이 퍼포먼스에 감정적으로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다. 

1961년에는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 공연에 참여해 <심플> <머리를 위한 선> 같은 행위 음악을 선보였다. 슈톡하우젠은 94분짜리 이 음악 연극의 전체 형식을 일곱 개의 구조와 18개 장면으로 구성하고, 시간 진행에 따른 연주자들의 등장까지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이 가운데 장면 11을 백남준에게 일임했는데, 총보에는 40분경 등장해 42분 30초부터 48분까지 실행하라는 시간 표시만 되어있다.10) 슈톡하우젠이 짜 놓은 틀 안에서 백남준은 열두 번의 퍼포먼스를 매번 다르게 진행했다. 빠른 동작으로 천장과 관객을 향해 콩을 던지거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두루마리 휴지를 아주 천천히 풀기도 하고, 물을 한 통 뒤집어썼다가 얼굴에 면도 거품을 바르고 쌀알을 흩뿌린 채 바닥을 굴러다니기도 한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연주하는가 하면 괴성을 지르고, 테이프에서는 온갖 소리의 파편들이 쏟아져 나온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갑자기 넥타이와 머리카락을 먹물이 담긴 접시에 담갔다가 종이 위에 서예를 하듯 선을 긋기도 한다. 슈톡하우젠은 자신의 구상대로 연주자나 배우들이 정해진 내용을 반복하며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길 원했지만, 백남준은 늘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관객을 놀라게 했다. 철저하게 계획하더라도 그것에 얽매이기보다 현장에 반응하며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오리기날레》의 연출자 아르투스 카스파리는 고정된 악보에 대한 슈톡하우젠의 집착을 비판하며 직관적 즉흥극을 원했는데, 불확정한 구조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백남준뿐이었다고 회고한다.11) 

백남준의 행위 음악은 전통적인 음악의 모습을 넘어서 있다. 작곡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이 악보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연주자들이 재현하여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피아노를 넘어뜨리고 온갖 물체로 지저분하게 만들며, 바이올린을 켜지 않고 내리쳐 부숴버리거나 줄에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행위는 ‘음악’의 상징적인 표상들을 파괴하며 시민사회 고급예술의 표상을 전복하려는 시도다.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난삽하게 파편화된 소리의 콜라주는 구조적 정합성을 해체하는 와해의 음악이다. 백남준은 음악의 관습을 부수고 다른 것들과 뒤섞어 음악의 경계를 넘나든다. 악기의 용도를 연주하는 것에서 소리 오브제로 바꾸고, 음악 퍼포먼스에 신체적 요소를 끌어들이며, 극적인 상황을 설정해 음악과 시각예술과 극예술을 자유롭게 오간다. 

그의 행위 음악에 나타나는 급격한 전환과 예측 불가능함, 갑작스러운 파괴와 공격성, 그에 따른 긴장감과 역동성은 백남준의 활력 넘치는 유희 기질과 극적 상황에 몰입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거기에는 원본의 재현이 아니라 매 순간 일회적인 ‘사건’만 존재한다. 악보로 그 실체를 파악할 수도 없고, 영상에 담았다 하더라도 현장 분위기나 관객과의 교감은 전달되지 않는다. 이런 일회성, 현장성이야말로 음악이 지닌 원초적 속성이다. 백남준은 점점 고도화되고 구조화되는, 불확정성 음악조차 악보로 고정되어 재현되는 것에 맞서, 원초적 음악의 상태를 다시금 일깨우려 한 것 아닐까. 그는 음악의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음악의 새로운 ‘존재’ 형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이 없는 음악(무음악)을 하겠다는 발상은 그런 문제의식의 발로일 터. 전후 서독 아방가르드 예술계는 백남준의 비전을 꽃피게 할 비옥한 토양이었다. 

3. 1960년대 초 쾰른의 전위예술 풍경

백남준이 도착했을 당시 쾰른은 전 세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인근 뒤셀도르프와 부퍼탈을 포함해 이 지역에는 온갖 강연과 공연 및 전시가 넘쳐났고 흥미진진한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많은 작곡가가 쾰른에 와 몇 년씩 머물곤 했는데 이들을 끌어들인 구심점은 1950년대 초 문을 연 서독일방송국(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였다. 20대에 이미 현대음악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슈톡하우젠이 전자음악의 개척자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마우리치오 카겔(아르헨티나)ㆍ죄르지 리게티(헝가리)ㆍ프랑코 에반젤리스티(이탈리아)ㆍ코르넬리우스 카듀(영국) 등 각지에서 온 작곡가들이 이곳에서 활동 중이었다. 

백남준에게 특별히 친밀감을 느꼈던 리게티는 그의 영향으로 해프닝이나 플럭서스에 잠시 발을 담갔다. 1961년 ‘지식인 유럽 포럼’에서 ‘음악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을 요청받고는, 강연자와 청중의 ‘음악적 도발’이라 불리는 침묵 강연을 했다. 미래란 예견하는 것과는 항시 다르게 전개되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스톱워치만 들고 단상에 올라, 자신에게 할당된 10분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간간이 칠판에 청중의 행위를 유도하는 몇 마디 단어들만 써가며, 다양한 반응과 소동을 긴장과 이완 및 클라이맥스가 있는 하나의 음악 작품으로 다루었다. 그 후기가 <음악의 미래-집단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데콜라주》 3호(1962)에 실렸는데, 계획된 10분의 연주는 중간에 끌려 내려왔기 때문에 8분으로 줄었지만, 간혹 나오는 독창자들(크게 소리 지르는 사람들)과 합창(웅성거리는 일반 청중)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강세 변화나 긴장감의 상승과 이완 등 음악 형식 면에서 적절했다고 썼다. 또한, 낮은 도(C)# 음의 잔향만 길게 울리는 3악장짜리 피아노곡 <세 개의 바가텔>을 써서 데이비드 튜더에게 헌정했는데, 이 곡은 1962년 비스바덴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었다.12) 현대 작곡가 리게티조차 쾰른 시절에는 백남준과 어울리며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인 작품을 남겼던 거다. 

백남준의 절친 화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도 전위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시인 한스 헬름스, 시각예술가 크리스토와 볼프 보스텔, 음악가 케이지ㆍ튜더ㆍ조지 브레히트ㆍ백남준 등이 이곳에서 최신음악ㆍ낭독ㆍ전시ㆍ행위예술을 선보였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이 초연된 곳도 그녀의 아틀리에였다. 1960년 6월 바우어마이스터는 흥미로운 일을 하나 벌였다. 당시 쾰른에서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주최 ‘세계현대음악제(World New Music Days)’13)가 열흘간 열리고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배제된 실험적인 음악을 발표하는 ‘반(counter) 페스티벌’를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대항 콘서트가 3일간 그녀의 아틀리에에서 열렸고, 헬름스의 낭독과 백남준의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를 포함해 이탈리아에서 온 실바노 부소티와 미국 작곡가들(케이지ㆍ라 몬티 영ㆍ조지 브레히트 등)의 곡들이 소개되었다. 슈톡하우젠ㆍ윤이상ㆍ튜더 같은 음악제 참가자들도 이 대항 콘서트에 함께 했다. 

백남준이 동료들과 퍼포먼스를 했던 장소는 공연장도 있었지만, 주로 작은 갤러리나 미술관 혹은 개인 아틀리에들이었다. 데뷔작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도 뒤셀도르프의 ‘갤러리22’에서 공식 첫선을 보였고, 《플럭서스: 최신음악 페스티벌》14)도 비스바덴 미술관 강당에서 열렸다. ‘갤러리22’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후원자였던 장피에르 빌헬름이 운영하던 곳인데, 1958년 10월에는 튜더와 카듀의 연주로 슈톡하우젠ㆍ크리스찬 울프ㆍ얼 브라운ㆍ모톤 펠드먼의 최신 피아노곡 콘서트가 열렸고, 케이지의 <음악 산책>도 여기서 초연되었다. 이 지역 전위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장소여서 1년 후 백남준의 첫 행위 음악도 크게 주목받을 수 있었다.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인연도 여기서 시작된다. 백남준에게 1962년 6월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를 뒤셀도르프 소극장에서 공연하도록 권한 이도 장피에르 빌헬름이었다.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 열린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 역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0년대 초 롤프 예를링 관장은 해프닝과 플럭서스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을 기획했는데, 《작은 여름 축제: 존 케이 이후 1962》도 그중 하나다. 1962년 6월 조지 머추너스와 벤 패터슨의 작품들이 소개된 이 공연은 몇 달 후 열린 본격적인 플럭서스 운동을 예고하는 행사였다. 당시 전시장은 시각예술가만이 아닌 전위 음악가들의 공간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공연장보다는 작은 갤러리들이 오히려 장르의 경계와 관습을 허물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는데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1961년 백남준은 퍼포먼스 아티스트의 길을 포기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무대 위에서의 갑작스러운 영감, 몸과 세계의 이원론이 지양되는 강렬함의 시기를 지나, 자유와 다양성, 시각적 즐거움과 인식론적 관심으로 문제의식이 옮아갔고, 전자기술과 새로운 미디어인 텔레비전의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15) 그 결실은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으로 드러날 터였다. 1961년 봄에 스케치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은 백남준이 ‘행위 음악’을 넘어‘전시장에서 펼쳐지는 시간예술’로 음악의 존재론적 형태를 새롭게 사유해보려는 시도였다. 

4. 음악의 전시, 공간 음악,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은 전시장에서 듣는 음악이다. 그런데 연주자가 있는 게 아니라, 열세 개의 테이프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일상 소음, 전자음향과 다양한 물체들의 소리, 낭독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고, 관객이 자유롭게 방을 옮겨 다니며 선택적으로 듣는 형태이다. 몇 개의 방에서는 관객이 직접 소리를 만들어내도록 요청받는다.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배분된 공간을 거닐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 음악을 구성하며 경험하는 것이다. 방마다 달라지는 조명, 향기와 바람, 더운 열기가 더해져 청각과 시각만이 아니라 후각과 촉각까지 동원해 소리의 향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교향곡의 악보는 한 장짜리다. 백남준은 16개16)의 사각형 안에 사용될 음악의 배치도를 그려두고 세세한 설명을 빼곡히 적어두었다. 이 스케치를 악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사각형 위에 pp, p, mp, fff, mf 같은 셈여림표가 붙어 있고 ‘스케르찬도(익살스럽게)’나 ‘안단테 소스테누토 에스프레시보(느리게 음의 길이를 충분히 유지하며 표현이 풍부하게)’ 같은 나타냄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사각형들 안에 표시된 소리의 시간적 연결이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의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연결되고 심지어 지나간 방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다방향의 시간 흐름이다. 

1950년대 현대음악의 주요 화두의 하나는 불확정성이었다. 백남준은 그것이 작곡가가 연주자에게 부여한 자유일 뿐 청중에게는 일반 음악과 다를 바 없음을 인식했다. 케이지가 동전 세 개를 던져 나오는 우연적인 조합으로 쓴 <주역 음악>(1951)도 수많은 반복 연습을 거쳐 연주되는 한, 청중에게는 우연과 상관없는 일반 악곡으로 들릴 따름이다. 철저하게 구조화된 작품이나 우연 음악이나 하나의 선형적 흐름인 건 동일이다. 백남준은 청중도 불확정성의 자유를 누리고 즐기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어떤 불확정적인 음악도, 악보가 있는 음악도 작곡하지 않았고, 곡의 연주를 포기하고, 음악을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17) 

음악은 시간예술이지만 공간성도 중요하다. 시대마다 연주되는 공간에 최적화된 음악이 만들어지고 향유되었다. 16세기 미사는 교회 예배당에서 불릴 때 가장 울림이 좋으며, 오늘날 콘서트홀은 19세기 오케스트라 음악을 잘 담아내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작곡가들은 오케스트라 음향의 공간 효과를 위해 악기 위치를 옮기거나, 강세와 음색 대비로 원근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에서 공간성이 전면에 드러난 건 전자음악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전자적으로 합성된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어야 하기에 스피커의 배치 자체가 음악적으로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 전자음악의 개척자였던 슈톡하우젠이 음악에서의 공간성에 천착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1958년 발표한 <그루펜>은 청중을 둘러싸고 U자형으로 배치된 세 그룹의 오케스트라가 서로 다른 템포로 연주하다 때때로 만나기도 하고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는가 하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음악이 이동하기도 한다. 전자음악에서 가능한 방식을 대규모 오케스트라로까지 확대한 시도였다. 

백남준은 1958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슈톡하우젠의 <그루펜>을 접하고 시간예술인 음악에 공간성을 도입하는 시도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슈톡하우젠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음악을 전시함으로써 시간적 제약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운 시간은 필연적으로 음악-공간으로 귀착”18)된다는 생각이었다. 백남준은 소리 나는 오브제들로 공간을 음향적으로 디자인하고 관객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방식으로 ‘공간 음악’을 구상했다. 미리 제작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갖가지 음악들, 방송이나 일상의 여러 상황에서 발설되는 목소리들, 발진기로 만들어진 전자음향들, 자연이나 물체 혹은 악기들의 소리까지, 엄청난 소리의 콜라주가 16개의 방에서 울려 퍼지며, 그곳을 옮겨 다니는 관객은 다방향의 시간 흐름을 스스로 구성하며 거대한 교향곡을 듣게 되는 것이다. 시간예술인 음악이 시공간의 예술로 확장된다. “통상의 음악회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청중은 앉아 있다. 행위 음악에서는 소리가 움직이고 청중은 공격당한다.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에서는 소리도 움직이고 청중도 움직인다.”19)

1963년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에서 백남준은 갖가지 소리가 해체ㆍ재구성된 ‘소리 콜라주’, 우연과 즉흥의 오브제로 변형된 ‘총체 피아노’,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되는 ‘인터랙티브’ 소리 작업 등으로 전시장을 뒤덮으며 전통적인 음악 관습을 전복하고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을 펼쳤다. 전시장을 음악가의 청각적 상상력을 구현하는 음향 공간으로 변모시켜 새로운 음악의 거처로 탈바꿈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음악의 전시’는 더 이상 낯선 형태가 아니다. 현장감은 있지만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공연장보다, 편한 시간에 자유롭게 관람하는 전시장이 음악의 대안 공간일 수도 있다. 음악이 전시되고, 공간이 음악이 되는,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을 펼친 백남준의 선구자적 시도가 61년 만에 처음으로 실현된다.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의 초연이 관람객들 모두에게 어떤 음악으로 기억될지 궁금하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완벽한 최후의 1초 – 교향곡 2번”. 백남준아트센터 2022. 3.24.~6.19. 전시회 도록에 실린 글


1) 백남준,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1977),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용인: 백남준아트센터, 2018), 216. 
2) 백남준, 「59세의 사유」(1991-92),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70. 
3) 백남준ㆍ구리타 이사무ㆍ소 사콘ㆍ이치야나기 도시ㆍ다카하시 유지ㆍ모로이 마코토, 「(좌담)세계의 전위와 음악」(1963/8, 『音樂藝術』), 『백남준의 귀환』(용인: 백남준아트센터, 2009), 186.
4) 1948년경 프랑스 라디오 방송국 엔지니어였던 피에르 셰페르가 처음 시도한 새로운 형태의 작곡 방식으로, 자연이나 주변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소리를 녹음한 후 그 구체적인 음향을 스튜디오에서 편집ㆍ변형시켜 테이프에 고정한 음악을 말한다. 
5) 1957년 12월부터 1958년 5월 20일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 참조. “Ich schreibe ‘Amusik’. Der Briefwechsel Nam June Paik – Wolfgang Steinecke (1957-61),” Darmstadt-Dokumente I (München: edition text+kritik), 112-119. 
6) 1960년대 후반 성(性)을 주제로 한 백남준의 이른바 ‘섹스 음악’은 국내에도 소개되어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1969년 9월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된 <콤포지션>이 그것이다. 검은 천이 처진 그랜드 피아노 위에 남녀가 누워 발로 피아노를 치며 연애하는 장면을 연출하다가 함께 팬티를 벗어 던진 다음 남자가 여자 위로 올라가 마치 섹스하듯 점점 숨 가쁘게 피아노를 쳐나가고, 마지막에 쾅 하는 피아노 소리가 앰프로 조종되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퍼포먼스였다.
7) 백남준, 「볼프강 슈타이네케에게 보내는 편지」(1958년 12월 8일),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428. 
8) 1930년대 말 케이지가 피아노 줄에 각종 물체를 미리 끼워 넣어 색다른 소리가 나도록 만든 방식을 말한다. 지금은 대표적인 현대 피아노 기법의 하나로 널리 사용된다. 
9) 백남준, 「볼프강 슈타이네케에게 보내는 편지」, 428. 
10) 이 작품에 관해 슈톡하우젠이 쓴 글과 악보는, K. Stockhausen, Texte Band 2(Köln: DuMont, 1964), 108-129 참조. 
11) 아르투스 C. 카스파리, 「《오리기날레》에서 백남준이 한 부분」, 『백남준의 귀환』, 176-177.
12) 이 곡은 국내에서도 작년 초 16세의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독주회에서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바 있다. 
13) 1922년 설립된 국제현대음악협회(International Society for Contermporary Music)가 매년 나라를 옮겨 다니며 개최하는 대표적인 현대음악제로, 전 세계 회원국 음악가들의 출품작을 선정해 발표한다. 1960년 쾰른 《세계현대음악제》에서는 쇤베르크와 베베른, 스트라빈스키와 버르토크를 위시해 포르트너ㆍ카겔ㆍ슈톡하우젠ㆍ리게티ㆍ불레즈ㆍ노노ㆍ윤이상 등의 수많은 작품이 연주되었다.
14) 독일 플럭서스 운동의 출발로 여겨지는 이 페스티벌에서는 지역별(미국, 일본, 유럽/프랑스/세계)로 피아노곡, 다른 악기와 목소리를 위한 곡, 구체음악과 해프닝, 테이프 음악로 나뉘어 14일간 100곡 이상이 발표되었다. 케이지 이후 미국 작곡가들의 곡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백남준의 작품은 <심플>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환상곡 풍 소나타>가 포함되었다. 
15) 백남준, 「샬럿 무어먼: 우연과 필연」(1992),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53. 
16) 왜 제목과 달리 16개 방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각자 이유를 추측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테고. 
17) 백남준, 「음악 전시회」(1962),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395-396. 
18) 위의 글, 395. 
19) 백남준, 「음악의 신존재론」(1963), 『백남준의 귀환』,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