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과 정체성을 찾아서: 20세기 후반 한국의 현대음악 (Toward Modernities and Identities: Korean Postwar Contemporary Music)」

ISCM World Music Days 2016 Tongyeong

FOCUS
한국의 현대음악

현대성과 정체성을 찾아서: 20세기 후반 한국의 현대음악 (이 희 경)

20세기 벽두 유럽 대륙에서 전통과 인습에 맞서는 새로운 실험들이 한창일 때,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반도에는 19세기 말에 들어온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퍼져 가기 시작한다. 선교사들이 전파한 찬송가와 대한제국의 군악대 음악으로 시작된 서양음악은 일제강점기에 탄압받고 배제되던 전통음악 대신 한반도의 지배적인 음악 문화로 자리 잡아 갔다. 한국 전통음악의 오랜 역사에는 서구적 의미의 ‘작곡가’가 따로 있지 않았다. 홍난파나 안기영같은 초창기 작곡가들은 연주자나 교육자를 겸한 인물들로, 주로 단순한 노래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형성된 한국 가곡은 소박한 조성 음악의 어법에 피아노 반주가 붙은 정형화된 모습으로 1970년대까지 널리 애창되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선보인 작곡가는 윤이상과 김순남 세대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두 사람 모두 1917년생이다.) 1930-40년대 일본 유학을 통해 작곡을 공부한 이 세대는 자신들이 습득한 서구 어법을 한국적 정서로 표현할 방법을 고민했다. 김순남은 가곡집 《산유화》, 《자장가》와 기악곡들을 통해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어법과 사실주의적이고 표현적인 다양한 현대 어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사하며 뚜렷한 작가적 개성을 보여 준 한국 최초의 현대음악 작곡가라고 할 만하다. 이념 대립이 극심한 해방 공간에서 민족음악 수립에 앞장섰던 그는 미군정의 수배령으로 월북했으며 그곳에서도 숙청되어 창작적 재능을 만개하지 못한 채 스러졌지만, 그의 음악적 성과는 다음 세대에게 큰 시금석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한국 작곡계는 새로운 창작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55년 3월에 열린 한국작곡가협회의 첫 작곡 발표회에는 무조성이나 12음 기법 같은 새로운 어법에 관심을 둔 나운영, 윤이상, 이상근의 현대적 작품이 김동진, 김세형, 이흥렬의 조성적인 가곡과 함께 발표되었다. 이들 중 윤이상은 이듬해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전후 한국 현대음악의 초석을 닦은 이는 나운영이다. ‘선율은 한국적으로, 화성은 현대적으로’, ‘선토착화, 후현대화’ 같은 뚜렷한 모토를 내걸고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음악을 추구한 그는 수많은 저술과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 현대음악의 형성 초기에 큰 구실을 했다. 또한 1958년에는 이성재, 김달성, 정회갑 등 젊은 작곡가들이 시대에 맞는 현대적인 음악을 쓰겠다며 ‘창악회’를 결성했는데, 이때 ‘현대적’ 어법이란 전후 유럽에서 일고 있던 아방가르드 경향보다는 무조성, 12음 기법, 선법 화성 같은 그 전의 흐름을 의미했다. 한국전쟁 이후 열악한 사회 상황에서 동시대의 세계적 흐름과 호흡할 수는 없었다.

한국 현대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윤이상이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납치되어 귀국하게 된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의 ‘정치적’ 행위 때문에 ‘현대음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일었고, 신문 지상에 윤이상과 현대음악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며 일반인들에게 ‘현대음악’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것이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윤이상에게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작곡가 강석희가 레슨을 받겠다고 찾아간다. 1966년에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을 발표한 강석희는 제한된 정보밖에 얻지 못하던 당시 국내 상황에서 현대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알려는 열망이 누구보다 컸고, 그런 그에게 유럽 현대음악의 중심에서 활동하던 윤이상을 만난다는 것은 엄청나게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정보기관의 감시 하에 매주 두 번씩 받은 레슨을 통해 강석희는 윤이상이 10년 간 경험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1969년 독일 정부의 강력한 압박으로 석방된 윤이상은 독일로 떠났고, 폴란드에서 열리는 ‘바르샤바의 가을’ 같은 현대음악제가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그의 조언에 따라, 강석희는 그해 ‘범음악제’의 출발이 된 ‘서울국제현대음악제’를 개최했다. 한국 최초의 현대음악페스티벌인 이 음악제는 한국에 현대음악의 흐름을 공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강석희는 1970-1980년대 한국 현대음악의 아이콘이라 할 만큼 아방가르드적인 현대음악을 한국 음악계에 자리 잡게 했다.

한편 독일로 돌아간 윤이상은 곧바로 강석희, 백병동, 김정길 등을 독일로 초청해 작곡을 가르쳤다. 1년 만에 귀국한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강석희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범음악제’ 조직을 비롯한 국제적 활동을 이어 갔고, 이 시기에 나인용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한국 작곡계의 실질적 주도권은 젊은 작곡가들에게 넘어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현대적 경향이 주류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한국에 소개된 서구 현대음악의 흐름은 음렬주의, 음향 작곡,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 백남준의 행위 음악 등 다양했지만, 이런 경향들이 한국 음악계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워낙 짧은 기간에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소개되면서, 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새로운 것을 만들 여건이 마련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히려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서구 아방가르드 음악은 박정희 정권의 서구화, 근대화 이념처럼 빨리 따라잡아야 할 선진 기술로 이해된 측면이 크다. 그 때문에 강석희 세대는 다음 세대 작곡가들로부터 현대음악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고 비판받게 된다.

이건용이 주도한 ‘제3세대’ 작곡 동인은,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것이 한국 작곡가들의 유일한 길은 아니며 우리의 현실과 상황에 뿌리내린 음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사회 현실에 대한 무관심, 한국의 전통에 대한 이해 부족, 청중과의 소통 부재 등을 전후 한국 작곡계의 세 가지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자신들의 과제라고 선언했다. 분단 이후 냉전 논리와 군부독재가 지배한 한국 사회에서 작곡가들은 철저히 현실에 순응했기 때문에, 이들의 비판적 문제제기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6년 4월 이만방의 시국 선언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평범한 소시민적인 작곡가로서의 대학교수의 이야기’도 이런 사회적 흐름에서 나왔다. 1980년대는 ‘현대성’과 ‘민족적 정체성’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쟁한 시기다. 사실 양자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였으나, 서양의 현대 어법을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재해석해 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 현대음악의 흐름에서 두드러진 양식이나 경향, 어법을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국 유학을 통해 접한 개인적 경험들이 사회적 활동으로 축적되기도 전에, 새로운 경향이 소개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1990년대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더 많은 작곡가들이 유학길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성을 내보이며 세계 작곡계에 두각을 나타내는 작곡가들도 등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진은숙이다. 강석희의 제자로 198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가우데아무스 작곡 콩쿠르에 우승하며 독일로 유학을 떠나 리게티를 사사한 진은숙은 아방가르드 흐름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에 몰두해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하는 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한국의 현대음악은 새로운 이슈와 담론 대신 외국 유학을 통해 섭렵한 양식들을 체득하며 각자 개성을 표출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성과 정체성 문제는 더 이상 이념적 선택이 아니라 현대음악의 변방인 아시아 작곡가들이 겪는 실존적 고민으로 자리매김한다. 전 세계적으로 주류가 사라지고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는 가운데 각자 개성을 발현하는 일은 결국 지역적인 것,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전통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제3세대’와 같은 세대인 이영조, 강준일, 이만방 등 1940년대 생 작곡가들도 수십 년간 천착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저마다의 고유한 어법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현대음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2000년 윤이상의 고향 통영에서 그를 기리며 시작된 ‘통영현대음악제’가 2002년에 ‘통영국제음악제(TIMF)’로 확대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음악제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1년에는 이 음악제의 홍보 대사로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인 ‘팀프 앙상블’이 창단되었다. 그 이전에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단체가 없지 않았지만, 이 앙상블의 창단은 우리나라에도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가 생겼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들은 국내 청중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뿐 아니라, 주로 아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해외 활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같은 해에 창단된 현대음악 앙상블 ‘소리Sori’도 새롭고 다양한 현대음악을 국내 청중에게 선보여 왔다.

또한 2006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작곡가 진은숙이 시작한 현대음악 연주회 시리즈 ‘아르스 노바’는 충실한 프로그램과 수준 높은 연주로 한국 현대음악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현대음악의 흐름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국내 작곡가들의 창작 활성화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아르스 노바’나 팀프 앙상블의 한국 작곡가 신작 위촉은 물론이고, 개별 연주자들에서 실내악단, 오케스트라, 오페라단에 이르기까지 한국 음악계 전반에서 새로운 창작곡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전통음악 연주자들과 실내악단 및 관현악단에서도 색다른 편성과 스타일의 신작 위촉에 적극적이다.

전자음악과 컴퓨터음악 역시 한국 현대음악에서 중요한 흐름을 차지하고 있다. 1993년에 창립된 한국전자음악협회는 해마다 ‘서울국제컴퓨터음악제(SICMF)’를 개최하며,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전자음악 연주회인 ‘fest-m’도 열고 있다. 한양대 전자음악연구소의 활동도 주목할 만한데, 이들은 2014년 아시아 최초로 이르캄 포럼 워크숍을 주최하기도 했다. 또한 2008년에 결성된 ‘태싯그룹’은 한글 채팅이나 게임처럼 친숙하고 대중적인 소재를 사용한 디지털미디어 퍼포먼스와 알고리즘 예술, 뉴미디어 예술 등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다양한 시도로 탈경계적 현대음악의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 준다.

한국의 현대음악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륙의 끝에 자리 잡은 반도, 그 작은 영토를 휴전선이 가로질러 섬과 다름없는 지리적 조건에, 역사적으로도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이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시대를 오랫동안 겪었다. 외국과 본격적으로 교류한 지도 30~40년 정도밖에 안 되다 보니 세계적인 흐름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는 문화가 뿌리내리기 어려웠고, 특정 지역과 인맥을 중심으로 작곡 협회나 동인 같은 집단을 구성해 활동 영역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대결하고 호흡하기보다는 작곡가들만의 상아탑에 갇혀 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도 못했다.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열악하고 시장도 협소한 탓에, 많은 한국 작곡가들이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회장 황성호)는 예술의전당과 함께 매년 5차례의 실내악 작곡제전을 기획하고 그 결과를 유투브를 통해 공유하는 등 더 많은 청중과 만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소통하는 디지털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한국의 젊은 작곡가들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넓은 시야와 활동 공간을 갖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세계 초연 곡을 운 좋으면 실시간으로 들을 수도 있는 이런 세상에서 한국의 작곡가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상상할까? 서양음악이 들어온 지 한 세기를 지나 이제 그것이 음악적 모국어가 된 한반도 남단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향유되는 현대음악은, 비록 사회적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할지라도, 과거 어떤 것들보다 흥미진진한 현재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한국의 작곡가들은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성과 그것을 소리로 담아내기 위한 자기만의 표현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해나가야 할 것이다.


ISCM World Music Days 2016 Tongyeong. Sounds of Tomorrow
2016 세계현대음악제 자료집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