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상반기 공연 기록 1

2018년 114회, 2019년 128회를 찍고, 코로나 시기 건강 문제로 힘들었던 2021년에도 65회, 2022년 81회로 늘어나더니, 2023년 상반기에 벌써 62회 공연을 봤다. 물론 2월에 파리와 베를린에서 본 공연 15회, 통영국제음악제 공연 21회를 빼면 26회.

공연 다니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에 최대한 자제하는 중이다. 인상적인 공연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때그때 메모를 해놓지 않으면 기억은 휘발되고 어렴풋한 인상만 남게 된다. 그렇다고 매번 기록을 남기는 일도 쉽지 않다. 학기 중에는 매일매일 일거리가 쌓여 있고, 방학에는 항상 오작 편집일과 밀린 공부로 정신이 없는 터라, 작정하고 시간을 내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래도 6개월에 한 번은 간단하게나마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길어져 중간에 끊어야 할 듯.
일단 파리/베를린 공연과 통영국제음악제 먼저.

프랑스 프레장스 페스티벌(2.7.~12.)과 베를린 필하모니 비엔날레 (2.14.~22.)

2023 프레장스 페스티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단연 카바코스가 연주하는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정적의 파편”을 라이브로 처음 들은 거. 그날 연주는 유튜브에 올라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QlEFQqcKh8 (2023.2.10. 파리 필하모니홀. 켄트 나가노 지휘,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협연,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2022년 1월 LSO 초연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보긴 했지만(이 연주는 medici tv에서 볼 수 있음), 실연으로 듣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니까. 카바코스가 상주 음악가로 참여한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에서도 이 작품이 연주되어 운 좋게도 두 번이나 들을 수 있었다.

카바코스가 아니었다면 쓰이지 않았을 작품이라,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는 전혀 다른 성격. 수없이 많은 바이올린 협주곡이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색다른 모습의 협주곡이 탄생할 수 있다니. 단 악장 짜리 곡으로 25분간 쉼 없이 이어지는데, 카바코스의 내공이라 가능한 음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법과 표현이 어렵기도 하지만 제목처럼 ‘정적의 파편’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곡의 흐름을 장악하며 끌고 나가는 힘이 중요한 작품이어서다. 현대곡은 10분 이상 지속되면 집중력을 잃기 십상인데, 순식간에 25분이 흘러간다.

베르트랑 사마이유의 재발견. 공교롭게 1주일 차이로 파리와 베를린에서 샤마이유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보게 되었다. 두 공연이 전혀 다른 프로그램. 프랑스 연주자들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터라, 파리 공연 때 첫 곡 연주 듣고서야 떠올랐다. 몇 년 전 서울시향과 라벨 <왼손을 위한 협주곡> 연주했던 피아니스트였다는 걸. 그때도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지 싶어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역시 프랑스 피아니스트인가 하면서.

이번에 진은숙의 그 어려운 <피아노 에튀드> 전곡을 연주하는데, 연주자와 악기와 음악이 하나로 일체화되며, 몸에서 그냥 음악이 흘러나오더라. 그리제이의 <시간의 소용돌이> 연주도 훌륭했고. 진짜 어려운 곡인데 라이브로 들을 때마다 매료된다.

베를린에서 연주한 1950~60년대 피아노곡들(이번 베를린필하모닉 비엔날레 주제가 ‘1950~60년대’였다)은 리게티 <무지카 리체르카타>를 제외하고 케이지, 하르트만, 베리오, 메시앙의 곡은 모두 처음 들어본 것들. 우리가 책에서 배우는 다름슈타트와 음렬주의로 대표되는 1950년대가 얼마나 일면적인지, 실제 그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곡들을 접할 수 있는 유익한 프로그램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공연은 취소할까도 했다는데, 파리 공연 후 6일 만에 전혀 다른 도전적인 레퍼토리로 리사이틀 한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TIMF앙상블의 연주. 프랑스의 여러 현대음악 앙상블이 참여하는 페스티벌이었는데,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이야 워낙 세계적인 단체이니 예외로 치고, 다른 현대음악 앙상블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는 연주를 들려줬다. TIMF앙상블은 해외 연주를 더 잘하는 듯.

앙상블 연주 전, 첫 무대에 김유빈이 혼자 나와 윤이상의 <플루트 에튀드 5번>을 연주하며 이미 청중을 압도. 외워서 연주하니 몰입감이 더 살아났다. 2022년 통영에서도 하차투리안 협연 후 앙코르로 연주했던 곡. 윤 선생님이 살아 생전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뿌듯했을지… 뒤에 대금이 포함된 박선영의 작품도 연주되었는데, 프랑스 관객들은 윤이상 에튀드와 대금 소리를 한 자리에 들을 수 있어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걸 연결해 들을 만한 사람은 일부였겠지만…

진은숙의 <구갈론>은 어렵긴 하지만 워낙 재밌는 작품이니 연주자들도 신나서 연주했고, 마지막 곡 윤이상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확실히 성악가가 압도하는 에너지가 있어 청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소프라노 이명주의 활약.

베를린 필하모닉 비엔날레는 2월에 열리는 현대음악 시리즈로 올해는 리게티 100주년을 맞아 여러 연주회가 있었다. 베를린 체류 기간에 몇 개만 다녀왔는데, 1990년대 후반 베를린에서 들었을 때와 25년이 지난 현재 듣는 리게티는 많이 달랐다. 그간 현대음악의 흐름도 많이 변했고, 현대음악에 대한 나의 경험과 생각도 달라졌기 때문일 터. 예전에는 리게티가 현대음악 가운데 꽤 음악적이라 여겼는데, 지금 들어보니 그 역시 20세기 현대 음악가였다는 생각. 상당히 학구적인 작곡가. 그래도 놀라운 건 리게티 작품 들으러 오는 청중들이 많다는 거. 특히 베를린의 상징물인 부서진 교회(Gedächnis Kirche)에서 있었던 리게티 합창 공연은 바흐 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추운 겨울 날씨에 입장을 위해 교회를 둘러싸고 상당히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트모스페르>에 묻혀 빛을 못 보던 리게티의 초기작 <환영(Apparitions)>(1958)을 라이브로 들어보고 싶었는데, 사이먼 래틀이 건강 문제로 캔슬하고 핀처가 대타로 지휘하는 바람에 프로그램에서 그 곡이 빠져 결국 못 들었다.

귀국 전 드레스덴에 들러 본 정명훈 지휘, 드레스덴 카펠레의 조성진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연주는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다. 1878년 완공되었다는 젬퍼오퍼 극장에 들어가 본 게 성과랄까. 이런 옛날 극장들은 그 공간에 맞는 행동 양식을 요구하게 마련이라 의상이나 가방 등을 엄격하게 제한. 비까지 추적대는 추운 겨울밤, 현대곡 없는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자니, 뭔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제의적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공간의 의고적 분위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2023 통영국제음악제 (2023.3.31~4.9)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알찬 프로그램에 귀 호강하는 연주들로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여행지 분위기라 더 그렇겠지만, 열흘 동안 온전히 음악에 심취할 수 있다는 게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다. 작년부터 에어비엔비 숙소를 마련해 시장 봐서 밥해 먹으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음악회 듣는 일상의 루틴을 유지했다. 주말에는 사람들 만나 외식도 하고 사교도 하지만.

카바코스의 다섯 개 공연은 말을 더 보탤 필요도 없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줌으로 수업하느라 마스터 클래스를 못 간 게 아쉬울 따름. 특히 10대~30대 한국 젊은 음악가들(김선욱, 양인모, 박하양, 한재민)과 함께 연주한 후 그들에게 건넸다는 선배 음악가로서의 실질적인 조언들은 감동적이기까지.

앙상블 모데른과 함께 한 김선욱의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 역시 최고의 순간이었다. 유럽 유학 시절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을 라이브로 서너 번 봤지만, 그때마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협주곡’이라기에 피아노의 존재감이 크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김선욱의 리게티 연주는 이 작품이 엄연한 피아노 협주곡임을 입증했다. 리게티가 살아 이 연주를 들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지금까지 들은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 연주 중 단연 최고! 앙상블 모데른의 연주가 뒷받침되어 가능했겠지만.

온드레이 아다멕의 작품들도 흥미로웠다. 아이디어도 참신했지만 그걸 소리로 구현하는 방식이나 음악을 끌고 가는 음악적, 극적 장치들이 감각 있다. 최근 작품들은 실망스럽다는 평도 있던데, 앞으로 주목해보고 싶은 인물이다. 작곡가들이 40대에 접어들면 한 번씩 창작의 위기를 겪는 것 같다. 그걸 잘 돌파하면 다음 국면에서 더 좋은 작품을 보여주는 거고.

2023.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