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은숙과의 대화. 우주의 끝에 다다르려는 작곡가의 온평생
이희경 엮음 | 을유출판사 | 2024년 10월 25일
목차
엮은이의 말
- 음악하며 살아가기 – ‘인터스텔라’ 김지수 기자와의 대화
- 예술과 연구의 본질을 찾아서 – 로슈 커미션 마티아스 에센프라이스와의 대화
- 음악과 물리학의 마주침 – 물리학자 김상욱과의 대화
- 작곡의 이유, 궁극의 목적 – ‘원일의 여시아문-이도공간’에서의 대화
- 만들어 온 음악과 만들어 갈 음악 – 음악학자 이희경과의 대화
부록 | 진은숙 연보, 작품 및 음반 목록, 진은숙 음악의 연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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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의 말
작곡가의 말을 기록하는 일은 필요할까요? 작곡가는 전하려는 바를 음표로 악보에 적어두는 존재이고, 그 음표들은 연주자들을 통해 소리로 우리에게 전달되잖아요? 바흐나 모차르트, 베토벤이나 말러가 살았던 시대에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이 아닌 ‘말’에 귀 기울였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오늘날 이들 작곡가의 모습은 온갖 사사로운 기록들과 각색된 이미지로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있거든요. 작곡가의 일상을 엿보게 되면 그들이 창조해 낸 음악에도 좀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일까요?
20세기에 이르러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은 음표를 기록한 악보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정리한 글도 많이 남겼습니다. 특히 일반 청중과 만나기 어려웠던 낯선 음악을 시도했던 작곡가들이 그랬어요. 세기말 청중과의 단절을 자처했던 쇤베르크,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온 불레즈와 슈톡하우젠 같은 작곡가의 글은 한때 그들의 악보만큼이나 많이 읽혔답니다. 음악의 청취 경험보다 그 음악을 낳은 의도와 이론에 주목했던 1950~6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의 모습은 이념이 지배했던 냉전 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릅니다.
진은숙은 1980년대 중반 창작 활동을 시작했어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동아시아 출신 여성이라는 어쩌면 눈에 띌 수도 있는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고유한 음향적 상상력과 철저한 음악적 완성도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서서히 벼려가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후 얼마간 창작의 슬럼프를 겪기도 했지만, 작품 하나하나에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열정으로 극도의 정교함을 추구하면서 작곡가의 길에 나선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겪은 산고의 고통이야말로 오늘날의 진은숙을 있게 한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올곧게 걸어온 창작의 여정이 어느덧 40년이 되어 갑니다.
진은숙의 음악은 백인 남성이 주도해온 현대 작곡계를 넘어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현대음악’으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베토벤의 음악도, 쇼팽과 차이콥스키의 음악도 당시에는 현대음악이라 외면당하기도 했다는 걸 아시나요? 고전 낭만 시대를 지나 20세기에 수많은 음악적 시도와 실험이 명멸하는 과정에서 현대 작곡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과거와는 다른 현대의 감성을 작품 속에 녹여냈습니다. 새로운 정보도 쉽게 받아들이는 시각과 달리 새로움과 낯섦에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청각의 특성상, 현대음악은 현대미술보다도 더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작곡가의 말에 귀 기울이는 건 그가 빚어낸 추상적인 음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같은 거라고 할까요?
환상적인 소리의 마술사라 불리는 진은숙의 음악 듣기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청각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독특한 아이디어들에서 출발한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섬세하게 세공된 음들의 조각으로 구성돼 있고, 이것들이 역동적으로 직조되며 색다른 음향의 팔레트를 펼쳐 나가거든요. 트로이 여인들의 울분과 세이렌의 침묵에 담긴 이야기, 소프라노 가수의 직업적 특성과 별들의 아이들인 인간에 대한 우주적 대서사시가 다뤄지기도 하고, 빛의 움직임을 음악적으로 재현하거나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이전까지 표현하지 못했던 독특한 소리를 길어 내기도 합니다. 진은숙 창작의 원천이라 할 꿈의 세계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달의 어두운 면》 같은 오페라의 출발점이기도 하고요. 흥미진진한 진은숙의 음악 세계로 들어가는 길잡이 역할을 위해 이 대담집을 기획했습니다.
2012년 독일에서 50세를 맞아 출간된 진은숙 책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제 인터뷰도 추가했었어요. 외국어를 옮기는 데서 느낄 수 없는 내밀한 모습이 한국어 대화에서는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했고, 작곡가가 60세가 되면 한국어로 나눈 대화를 기록하리라 마음먹었어요. 정제된 글이 아닌 말의 기록에는 때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충돌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질적인 다중의 자아로 구성된 복잡한 존재들이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니까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예술가의 내면을 말이라는 다소 즉흥적인 틈새를 통해 들여다보려는 욕망은 추상적인 음악을 창조하는 예술가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한 소통의 방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낯설게만 들리는 현대음악도 그걸 만든 사람의 모습을 친근하게 접한다면 조금은 다르게 들릴 수 있고, 사람에 관심이 생겨야 그가 만든 창작물에도 마음이 열리는 법이니까요. 낯선 음악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이에 놓인 심적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인생사가 늘 그러하듯 이 대담집도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어요. 2021년 60세를 맞아 전 세계 곳곳에서 진은숙 음악회들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곳들을 방문해 현장에서 몇 차례의 인터뷰를 진행하려 했었는데, 2020년 발생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듬해까지 대부분의 공연이 열리지 못했어요. 원래의 인터뷰 기획은 무산되었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나누는 대화로 방향이 바뀌면서 현재의 구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화는 서로 간에 주고받는 상호적 소통이어서, 그날그날의 개인적 상황, 상대와의 친분 정도, 대화가 이뤄지는 시공간에 따라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기 어려운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워요. 그런 날것의 생생함을 최대한 덜어내지 않고 담아내려 했습니다. 2023~2024년에 가진 세 번의 인터뷰들 사이에 이전에 했던 두 번의 대화를 넣어 내용을 보완했어요. 진은숙과의 대화에 흔쾌히 시간을 내주신 ‘인터스텔라’ 김지수 기자님과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 그리고 이전 대담을 수록하도록 허락해 주신 루체른 페스티벌과 로슈 기업의 마티아스 에센프라이스 이사님, 원일 작곡가/예술 감독님과 국악방송 제작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신없는 일정 속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 인터뷰에 응해준 진은숙 작곡가에게도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말과 글은 다른 생리를 가진 터라 지면으로 접하는 작곡가의 말이 어떤 감응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합니다. 이 다섯 번의 대화가 진은숙 음악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기를 바라며 대담집 곳곳에 QR코드를 넣어 진은숙 음악에 바로 접속할 수 있도록 했어요. 무엇보다 작곡가는 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존재니까요. 긴 시간 기다려주신 을유문화사 최원호 편집자님을 비롯해 디자이너님들과 정상준 대표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을 지나왔으니 이 대담집이 많은 이들에게 가 닿아 결실을 거두기 바랍니다. 독자분들이 진은숙 음악 청취의 즐거움도 만끽하게 되시길…
2024년 9월
이 희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