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츠에 시대에 인간 본질에 천착한 오페라, 진은숙의 <달의 어두운 면> 초연 참가기 (이희경)

지난 수년간 작곡가 진은숙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이야기와 음악이 마침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두 번째 오페라 <달의 어두운 면>이 2025년 5월 18일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어 6월 5일까지 다섯 차례 공연된 것이다. 2007년 6월 30일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첫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초연된 지 18년 만이다. 이번 오페라도 켄트 나가노가 지휘를 맡았는데, 1999년 <시간의 거울>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어느덧 26년째 이어지고 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던 함부르크의 일요일 저녁, 초연 오페라를 보기 위해 극장에 모여든 청중들의 상기된 표정에는 은근한 기대와 흥분이 감돌았다. 함부르크는 작곡가 진은숙에게도, 이 오페라의 소재가 된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에게도 의미 있는 장소다. 파울리는 1923년부터 1928년까지 함부르크에서 활동했고, 1925년 이곳에서 공식화한 ‘배타 원리’로 1945년 노벨상을 받았다. 파울리는 이때를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여겼다고 한다. 1985년 죄르지 리게티에게서 배우기 위해 함부르크로 유학 온 진은숙에게는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40년 만에 자신의 오페라가 이곳에서 초연되니 “긴 여정의 마무리처럼 느껴진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렇다면 이 양자역학의 개척자와 진은숙 간에는 어떤 연결점이 있는 걸까? 진은숙은 오래전 하이젠베르크 평전을 읽다가 볼프강 파울리라는 인물을 알게 됐고, 꿈에 집착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이 과학자에게서 오페라의 소재를 발견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은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었기에 파울리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오페라 속 인물들은 파울리의 전기에 등장하는 이들(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나 유흥가 여성 및 꿈속 형상들)을 모티프로 하지만, 모두 진은숙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창조된 존재들이다.

천재적이지만 인간적으로 미숙한 과학자 ‘키에론’을 통해 진은숙은 자신의 꿈과 영혼을 잃고 파멸에 이르는 인간의 비극을 그려 낸다. 오페라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영혼 치유자 ‘아스타로트’는 시니컬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허약하고 이중적인 인간 본성을 꿰뚫고 그 영혼을 지배하는, 묘하게 설득력 있는 악인으로 형상화된다. 키에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던 유흥가 여성 ‘미리엘’이 결국 그를 떠나듯, 이 오페라의 인물들은 정형화된 선악 구도나 전형적인 구원의 여성상을 벗어나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키에론의 상반된 두 세계인 연구소와 술집 외에 또 하나의 핵심 공간인 꿈속에는 ‘빛의 존재’ ‘아니마’ ‘빛의 소녀’라는 세 형상이 등장해 이 오페라를 더욱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로 이끈다.

작곡가가 직접 창조한 서사의 무게

2막 10장으로 구성된 <달의 어두운 면>은 러닝타임 세 시간 30분(1막 한 시간 45분, 2막 한 시간 15분, 휴식 30분)에 이르는 장대한 오페라다. 1막은 키에론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데 집중한다. 안하무인의 천재 과학자이자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는 골칫거리, 그리고 꿈속에서 마주하는 형상들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풀고자 하는 욕망 끝에 결국 아스타로트를 찾게 되는 과정이 치밀하게 구축된다. 1막 마지막 5장(아스타로트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키에론의 내면적 고뇌가 솔직히 토로되고, 아스타로트는 그의 영혼을 점차 장악해 간다.

2막은 아스타로트에게 영혼을 잠식당한 키에론이 서서히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과학자가 이성을 배반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그를 지탱하던 꿈속 형상들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스타로트의 입을 통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의 허위의식이 통렬하게 비판된다.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서 버림받는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던 비전과 꿈, 인간성으로부터 버림받고 스스로 무너지는 존재의 내면적 붕괴를 다룬다. 꿈을 붙잡으려 했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완전함에 이름을 부여했기에 파멸에 이른 키에론의 운명은 상징적이다. 마지막 10장에서 목소리로만 들려오는 “아름다운 모든 것은 숨겨져 있다.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말라”는 말은, 궁극적 해답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이 오페라의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다채롭게 펼쳐진 진은숙의 음악 드라마

이번 오페라에서 진은숙은 인간의 양면성과 악의 속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대본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의 극적 흐름은 무엇보다도 음악을 통해 빛을 발한다. 오케스트라 서주부터 키에론의 마지막 아리아까지, 서사를 이끄는 강력한 추진력은 바로 음악이다. 현대 오페라에서도 보기 드문 혁신적인 타악기 구성의 오케스트라 음향은 인물·분위기·상황을 생생하게 구현하며, 대사와 지문으로 암시된 인물의 내면도 상상력 넘치는 음향으로 정교하게 뒷받침된다. 작곡가가 직접 이야기를 만든 만큼 대본과 음악의 유기적 결합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연구소 장면에서는 엄격한 대위법이 활용되고 꿈속 형상들은 각기 고유한 음향적 색채를 지닌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빛의 소녀’에게는 춤추는 듯한 음악이 부여되어 관객에게 낯설고도 매혹적인 청각 경험을 선사한다.

묵직하고 진지한 성격의 작품이지만, 곳곳에 삽입된 진은숙 특유의 유머는 오페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2장 유흥가 장면에서 키에론이 부르는 ‘스파게티 송’이나, 4장에서 강연장에 나타난 미리엘을 보고 당황한 키에론이 주절대듯 노래하는 빠른 템포의 리드미컬한 아리아가 대표적이다. 이때 등장하는 아코디언 소리도 코믹함을 더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음악적 장치는 무엇보다도 네 명의 연주자가 담당하는 다양한 형태의 타악기군이다. 타악기는 오페라의 핵심적 재료로 기능하며, 다양한 음색과 타법을 통해 독창적인 음향 세계를 창조해 낸다. 저음역대 악기들을 중심으로 넓게 퍼지는 사운드, 낮은 D음을 내는 큰 공의 반복적 등장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쿵쾅거리며 울려 퍼지는 팀파니는 키에론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다.

오페라의 마지막에 불리는 키에론의 아리아는 단순한 회한이나 절망이 아니라, 빛이 통제되지 않음을 깨닫고 고통과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는 자기 해체의 욕망, 곧 존재의 해소에 가까운 정서를 담고 있다. 존재론적 체념과 초월에 대한 갈망이 교차하는 이 아리아의 끝에서 키에론의 외침 “나를 산산이 부숴라”는 g단조 화음 속에 조용히 스며들며 사라져 간다.

인상적인 연출과 성악진의 열연, 돋보였던 한국 음악가들

극단 ‘데드 센터’의 무대와 시각적 연출도 압도적이었다.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높은 단 위에 자리한 키에론의 연구실과 회전 무대 반대편(‘달의 어두운 면’)에 놓인 또 하나의 계단 꼭대기에 자리한 아스타로트의 진료실 침대는, 각각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자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려는 자라는 두 주역의 상반된 성격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영상 프로젝션의 적극적 활용도 흥미로웠다. 무대 앞의 반투명 천에 투사된 라이브 영상은 키에론의 연구실 책상 위 모습을 확대해 보여 주거나, 술집 장면에서는 카메라맨이 인물들을 밀착 촬영한 실시간 영상이 투사되어 인물들의 표정과 세세한 움직임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특히 실체와 환영의 경계를 넘나드는 꿈속 캐릭터들은 이러한 영상 연출을 통해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1막 마지막, 아스타로트의 침대에 누운 키에론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채로 장면이 끝나고, 2막 전주에서 그 화면이 그대로 이어져 키에론이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영상으로 연결되며 꿈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성악진의 열연도 돋보였다. 세 시간에 걸친 장대한 오페라를 이끈 바리톤 토마스 레만(키에론 역)은 이성과 광기, 회의와 황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물의 내적 분열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냈고, 바리톤 보 스코브후스(아스타로트 역)는 여성 환자들을 지배하며 냉소적으로 신랄한 독설을 쏟아내는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했다. 소프라노 시오반 스태그(미리엘 역), 테너·카운터테너·소프라노가 각각 맡은 세 명의 꿈속 형상들은 두 주역 바리톤과 대비되며 극에 섬세한 균형과 생동감을 더했다.

이번 무대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활약 중인 한국인 음악가들의 약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카운터테너 김강민(아니마 역)과 소프라노 손나래(빛의 소녀 역)는 독창적인 해석과 개성 넘치는 무대로 깊은 인상을 남겼고, 함부르크 국립오페라 합창단에도 여덟 명의 한국인 성악가들이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무대 전면 중앙의 작은 박스 안에서 성악가들에게 정확한 타이밍과 지시를 전달하며 지휘자와 무대를 효과적으로 중재한 ‘프롬프터(soufflage)’도 한국인 김성윤(Marco Kim)이었고, 함부르크 필하모닉 국립오케스트라에도 한국인 단원들이 다섯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달의 어두운 면>은 진은숙의 첫 오페라와는 확연히 달랐다. 두 작품 모두 작곡가의 삶과 창작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꿈’을 공통된 소재로 삼지만, 주인공이 소녀(소프라노)가 아닌 과학자(바리톤)라는 점,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닌 작곡가가 직접 창조한 서사라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첫 오페라가 역설과 생기가 넘치는 콘서트 형식의 오페라였다면, 이번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드라마로, 레치타티보가 많고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극적 서사를 구축한다는 점에서도 명확히 구분된다. 열 개의 장면이 엄청난 밀도로 전개되며,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을 거의 인식하지 못할 만큼 몰입감을 선사한다. 짧고 빠른 자극이 소비되는 이른바 ‘쇼츠’의 시대에, 이처럼 장대한 오페라를 뚝심 있게 완성해 낸 작곡가의 내적 에너지는 실로 경이롭다. 이 오페라는 직관적으로 귀를 사로잡는 흥미로운 대목들도 많지만 훨씬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어, 관객들은 각자의 질문을 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달의 어두운 면>은 키에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지닌 내면의 어둠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사람은 달과 같아서,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어두운 면을 지니고 있다”는 아스타로트의 말처럼, 이 오페라는 우리가 외면해 온 상처와 혼돈, 욕망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진은숙은 빛의 반대편에 감춰진 인간 존재의 균열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묻는다. 우리는 과연, 저마다의 ‘달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클럽 발코니』 117 (2025년 7월-9월호), 50~51.